식민지배와 민족 해방운동의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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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식민지배와 민족해방운동의 추진

2.림시정부의 초기활동

3.임정의 성립

4.임정활동

5.임정의 침체

본문내용

제연맹 위임통치론은 정쟁의 가장 큰 불씨가 되었고,임시정부 안의 평안도파와 기호파(畿湖派)의 대립은 파쟁의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북경을 중심으로 신숙(申肅) 신채호(申采浩)등 독립 전쟁론자들이 군사통일준비회를 열고 이승만을 불신임하면서 임시정부 활동과 독립운동 전체의 방향전향을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장했고 이에 상해와 만주 노령지방이 호응하고 나섰다. 각 지방 해외동포사회의 70여 단체 대표 1백여 명이 모여 개최한(1923.1) 국민대표회의는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과정 전체를 반성하는 한편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실천에 맞도록 개조하자는 개조파(改造派)와 현종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창조파(創造派)로 나뉘어져 팽팽히 맞섰다. 결국 국민대표회는 결렬되고 창조파는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노령으로 갔으나 소련의 원조를 얻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크게 타격을 받은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헌법개정을 통해 대통령제를 없애고 국무령(國務領)으로 바꾸어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했다. 뿐만 아니라 임시헌법의 적용범윈오 종래의 '인민'에서 '광복운동자'로 좁히는 등 큰 변화를 겪으면서 독립운동 전체를 통괄하는 정부라기 보다는 하나의 개별 독립운동 단체로 변하는 침체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독립전쟁을 '최후의 수단'으로 상정하고, 또한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멀고 교포가 그다지 많지 않은 곳에 거점을 마련함으로써 조선민중과의 괴리감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리고 해방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시행하려고 했던 서울진공작전은 끝내 시행되지 못했고, 이는 해방 후 서구 열강들로 부터 상해 임시정부가 식민하에서의 한국정부로서 공인받지 못하는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신채호등이 주장한 독립전쟁론을 사실상 포기함으로써 야기되었던 문제는 해방후 한국의 자주권회복에 있어서 적지않은 악영향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조선민중의 독립에 대한 여망으로 세워진 임시정부는 그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중과의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한 것, 그리고 이승만을 축으로 하는 외교독립론의 주시행등은 그것이 민중의 뜻과는 어떤 면에서는 상반된 지식층 위주의 독립운동이었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해방에 따른 서울 진공작전의 무산은 정말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도서
강만길 『분단시대의 역사인식』1978년
강만길 『한국현대사』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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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2.07.28
  • 저작시기2002.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9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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