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일제하 조선(한국)의 노동운동 - 1920년대 노동운동 (일본 독점자본과 지배정책과 노동자, 전국적 노동단체의 등장, 노동자의 요구와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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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일제하 조선(한국)의 노동운동 - 1920년대 노동운동 (일본 독점자본과 지배정책과 노동자, 전국적 노동단체의 등장, 노동자의 요구와 투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일본 독점자본과 지배정책과 노동자
 (1) 경제정책과 자본
 (2) 노동계급의 상태

2. 전국적 노동단체의 등장

3. 노동자의 요구와 투쟁
 (1) 전반기 (1920~1924)
  (a) 부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b) 경성 고무여성노동자 투쟁
  (c) 5·1절 투쟁
 (2) 후반기 (1925~1929)
  (a) 목제유노조 파업
  (b) 원산총파업

참고문헌

본문내용

업에 들어갔다. 이에 당황한 회사측은 일제 경찰로 하여금 파업단의 주요인물을 검거케했다. 그리고 새로 일본인 인부들을 고용했지만, 이들도 파업 중이라는 것을 알고는 모두 돌아가 버렸다 결국 회사 측은 파업 20여 일만에 노동자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3개월 안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회사 측은 원산노련을 부정하고 취업규정을 개악하여 발표했다. 이에 원산노련은 긴급히 중앙위원회를 개회하여 8시간 노동제의 실시, 취업규칙의 개정 등 요구조건을 제시했고, 문평제유노동조합과 문평운송조합이 원산노련의 결정에 따라 동맹파업을 단행했다. 그리고 1929년 1월 14일 원산 부두노동자들도 파업을 벌여 이 회사의 물품을 일체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회사 측은 일본 자본가들의 집단인 원산상업회의소(원산상의)에 파업 해결을 일임했다.
원산상의는 이것을 빌미로 원산노련을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월18일 450명의 부두 노동자를 해고했다. 그리고 노동자 신규채용을 통한 내부분열의 획책, 선전 유인물을 통한 모략중상, 새로운 어용노조의 조직 등 온갖 적대적인 수단을 동원한다. 1월 22일 원산노련은 이러한 원산상의의 횡포와 기업주의 강압적인 태도에 맞서 파업을 선언했고 두량노조, 해량노조, 결복노조, 운반노조, 원반중사조합, 원산제면노조 등 2천여 명의 노동자가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제 파업은 문평제유회사의 차원을 뛰어 넘어 원산지역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결로 격화됐다. 원산노련은 원산상의의 노동자 모집을 저지하기 위해 노동규찰대를 전국각지에 파견하고 강연회 개최, 가두연설, 전단 살포 등의 대중선전사업을 진행했다. 또한 파업자금 확보를 위한 금주금연동맹 등의 전술을 사용하는 등 총파업의 강도를 높여갔다. 이에 맞춰 1월 26일 이후에는 양복, 의복, 신문사, 양화 직공들에 일본인 목공 토공들도 파업에 합세했고, 자유노동자들도 노조를 만들어 파업에 동참하는 등 총파업은 더욱 확산되어 원산 전체를 마비시켜 버렸다.
이렇게 총파업의 기세가 등등해지자 일제 경찰과 군인이 동원됐다. 함남 경찰부는 300여 명의 경찰관을 급파하고 파업단 간부 7~8명을 검거했다. 또한 일본인 재향군인과 청년회, 소방대원을 동원하여 시가지를 엄중하게 경계했고 함흥 보병대에서 300여 명의 군인을 원산으로 데려와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원산노련은 이에 굴하지 않고 상의에 공동 대중 토론회를 갖자고 제의하는 등 더욱 투쟁의 강도를 높여갔다. 일제 경찰은 원산 노련 간부들을 계속 검거, 구타, 납치, 투옥 하였고 1월 29일에는 원산노련 장부까지 압수하였고, 뿐만 아니라 경찰은 모든 사회단체의 활동을 금지시키고 2월 7일에는 원산노련 위원장 김경식과 상무집행위원 4명을 협박포격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산노련은 2월 9일 김태영을 비롯한 간부들을 보충하고 투쟁을 이어나갔다.
이처럼 엄혹한 탄압에도 총파업 대열이 흩어지지 않자 일제는 분열책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원산상의는 2월 19일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동단체를 설립하고 파업을 사회주의운동으로 몰아 치안유지법을 적용하겠다고 파업지도부와 노동자들에게 으름장을 놨다. 그러자 서울의 변호사 출신이면서 원산노련의 새 지도부를 맡은 김태영은 원산상의와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노련의 강령과 간부들을 바꾸고 3월 말 무조건 자유취업을 지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파업대오가 동요하고 이탈하는 자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분노한 노동자들은 4월 초 함남노동회 사무실을 습격하고 어용 간부의 집에 쳐들어가는 등 사태의 반전을 시도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상황을 돌이킬 수 없었다.
마침내 원산노련은 4월 6일 직장복귀를 결정했고 총파업은 84일 만에 그 깃발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원산의 노동자들은 운동의 재건을 시도하여 1929년 12월 원산노련 집행부를 꾸리고 1930년 1월에는 원산대파업을 기념하는 대규모 집회를 여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벌였다. 또 함남노동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1930년대 비합법적 노동운동 상황에서 노동해방과 민족해방을 위한 싸움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원산총파업은 문평제유라는 조그만 공장에서 시작됐던 파업이 일본의 자본가와 그 하수인 집단, 일제의 식민지 권력기구와 관변단체 등의 연합 전선에 대항하는 원산지역 노동자들의 총단결을 통한 과감한 결전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원산총파업은 그 지속성, 강인성, 격렬성, 조직성에서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노동운동사에도 보기 드문 투쟁이었다. 따라서 일제의 포악한 무단통치를 폭로하고 민족해방운동의 단계를 한 차원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와 배경이 있지만 무엇보다 투쟁에 대비한 철저한 준비와 탁월한 지도부의 헌신적인 노력을 우선적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원산노련은 1925년 10월 결성된 이래 산하 조직의 쟁의를 적극적을 조직, 지도하여 노동자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착실하게 기금을 모아 파업자금을 꾸준히 준비하는 한편, 노동자의 복지향상을 위하여 노동병원, 노동자 이발부까지 설치하여 노동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원산의 노동자들은 원산노련을 굳게 지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노동자가 단결하여 싸운다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원산 총파업은 노동자들에게 식민지 노동운동은 그 자체가 바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의 일환이고, 민족의 해방 없이는 결코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생활권을 근본적으로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고 광범위하게 각성시켰다. 이원보, 앞의책, 75~81쪽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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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만, 『한국노동운동사Ⅰ』, 지식마당, 2004
김경일, 『한국노동운동사Ⅱ』, 지식마당, 2004
김경일, 『일제하 노동운동사』, 창작과 비평사, 1992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05
최윤규, 『근현대 조선경제사』, 갈무지, 1988
김윤환, 『한국노동운동사1-일제하편』, 청사, 1982
김윤환, 『한국노동운동사 1』, 청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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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9
  • 저작시기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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