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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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3 장 근대의 기독교
1. 반 개혁운동(Counter Refirmation) 과 신교의 재 정리
2. 자연신학과 경건운동
3. 칸트와 현대신학

제 14 장 선교사업과 한국교회
1. 세계 선교사업
2. 한국교회의 발전

본문내용

은 신에게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인데, 거기에는 신,인 이란 분리되여 있지 않다. 이것이 곧 경건이며 신앙이다.
그 반면 신에 대한 의식과 자아의식은 벌서 하나님과 사람이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만 가능한데 여기서 신의 존엄성과 인간의 부족이 비교되어 죄라는 관념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으로 화육된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함일되어 귀의의 감정을 회복한다고 하였다.
그가 종교를 감정의 작용이라고 밝힘으로서, 종교의 영역을 형이상학이나 도덕안에만 국한되지 않게 한 것은 확실히 종교사상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공헌이다. 슈라이엘 막헬의 뒤를 이어 릿출(Albrecht ritschl, 1822~1889)은 역사성을 새롭게 강조하여, 인문과학과 신학의 기초로 삼았다. 종교도 인문에 소속된 이상, 자연과학방법으로 연구할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인격의 힘과 문화의 발전에 치중함을 따라, 기독교를 사회문제에 눈 뜨게 하여, 후에 미국에서 성행한 사회복음 운동을 산출하는데 큰 자극을 주었다. 또한 '벨 하우젠'과 '바우어'는 성서를 신의 계시로 보지 않고, 주관의 산물로서 역사의 제약을 받아, 그와 같이 발전된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동향으로 신학이 현대철학의 제문제, 과학의 비판, 사회에 대한 책임을 새로이 검토하였으나, 슐라이엘 막헬 이후 신학의 기초를 사람의 편에 내재케 하였으며, 신의 초월성을 잊었던 것이다.
세계 대전을 계기로 인류는 인간의 잔악성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의 노력으로 모든 것이 점차적으로 변화한다던 낙관주의를 버리게 되었다. 파스칼과 키엘케골 등을 통하여 지,행이 분리되고 모순으로 꾸며진 인간성과, 내재한 잠재의식의 세계는 원시적인 의욕이 제한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때 슈펭글러(O. Spangler, 1880~1936)는 서구의 몰락을 예고하였고, 발트(Karl Barth)는 위기의 신학을 선포하며 절대타자로써의 신을 제기하여 인본주의적인 경향을 변화시켰다.
미국이 기독교는 청교도들에 의하여 돈독한 심앙심과 교양있는 사람들로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칼빈주의적 경향에 동조하고 있었으나 유니테리안(Unitarianism )주의와 심각한 대결을 하게 된다. 부슈넬(Horace bushnell 1802~1876)은 기독교 교육이, 교리 주입 보다가는 종교교육을 통하여 자연적으로 육성시키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였다. 이즈음 신앙부흥이 다시 전개되고, 무디(Moody) 와 같은 인물들에 의하여 주도되어 세계 선교에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제 14 장 선교사업과 한국교회
1. 세계 선교사업
세계적인 선교조직은 1784년의 모라비안들을 중심하여 1795년의 런던 국제선교협회, 1797년 종교소책자협회 등으로 부터이다. 인도에서 서는 케리(Wiliam Carey)가 침례교의 후원으로 뱅골지방에서 선교하였다. 아프리카에서는 모펠(Ribert Moffatt)이 개척하였다. 중국선교는 1807년에 모리슨(Robert Morrison)을 마카오에 파견하므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선교는 여러 가지 난관을 타게하기 위하여 1901년 에딘버러에서 세계 선교대회(International Mission Cinference)로 모인다. 그후 1920년에는 스톡호름에서 '사업과 생활'을 위하여 논의를 하고 1927년 로잔에서 '신앙과 사회질서'문제를 가지고 모이게 된다. 1948년 암스텔담에서 대다수의 신교파들이 처음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고, 1954년에는 미국의 에반스톤에서 2차대회를 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선교는 일방적인 방식을 떠나, 교파와 교파, 선교국과 피선교국간의 차별을 없이하고, 상호협조적인 방향으로 재편성케 되었다.
2. 한국교회의 발전
A. 구교의 전래
기독교의 한국 소개는 선교사들에 의한 직접적인 것 보다, 일본과 중국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이었다. 1592년 임진외란때 일본 소서행장의 종군신부 세스페데스가 입국하였다. 기독교는 실학자들에 의하여 연구 되었다. 박제가, 정약용등에 의하여 북학(실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천주교를 접하게 되고, 남인들에 의하여 퍼지게 된다. 그러나 남인들의 세력이 꺽이자 신유사옥(1801)을 격게 된다. 그후 김대건의 신부 서품으로 국내 포교활동에 크게 힘썼으나 1839년, 1866년 박해가 계속되어 선교활동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B. 신교의 선교
1932년 구츠라프(Gutzlaff)는 만주에 와서 우리나라를 상대로 전도하려하였다. 1865년 토마스(Thomas) 목사는 순교를 당하였다. 최초로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는 알랜이다. 언더우드, 마펜셀라, 스크랜턴등이 도착하면서 선교가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은 네비어스(Nevius) 선교 방법을 채택하여 선교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전제군주세도속에서 민주주의적인 정치와 서양 문물을 소개하였고, 교육과 의료혜택을 주며 서양문명으로 길을 열어주는 창구가 되었다.
C. 한국교회의 수난과 발전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극단적인 수난에 봉착하였다. 1905년 일본의 침략지배가 되면서 엄청난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04년 원산의 하기 사경회를 시작으로 회개운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백만신도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07년 초대 독노회가 만들어지고 1922년 '전선주일학교연합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1937년 전시동원령을 내리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이때 우리 교회는 신앙을 위한 순교자들을 많이 배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피해속에 민족은 드디어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깐, 1950년 6,25 사변을 맞이하게 되어 또 한번 민족의 수난을 겪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이 시기 '기독교 연합 전시비상 대책 위원회' 등을 결성하여, 국가의 어려움을 세계에 알림으로써 세계교회의 일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 개신교회는 짧은 시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 끼친 공헌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짧은 기간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진리를 다 들어내지 못한 부분도 있다. 개신교은 오늘의 소임을 깨달아, 더욱더 그리스도의 삶을 전함으로, 민족의 내일을 열어가는 이 민족의 횃불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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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2.10.22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7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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