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대하여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 53
  • 54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독일의 교육과정
2.독일의 대학에 대하여...
3.입국 및 체류규정
4.기후
5.여행시즌
6.옷차림
7.의료보험
8.대중교통
9.시차
10.쇼핑
11.식사
12.화장실
13.전압
14.금연
15.비상시 유용한 전화번호
16숙소
17.유스호스텔
18.학생기숙사
19.개인주택에서의 자취
20.공동자취생활
21.아르바이트 장소?

본문내용

된 이후, 아돌프 히틀러는 뛰어난 외교적 수완과 혁신적인 경제 재건 방안을 실시하여, 독일 경제를 팽창시켰고, 독일을 다시 유럽의 강대국으로 자리잡게 하였다. 한편 이와 함께 그의 중요한 공약이자 독일 변신의 또다른 원동력이었던 유태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몹시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는 신체 건강한 남자였으며, 성적으로도 보통의 남성과 다를바 없었으나, 여자 관계가 깨끗했다. 그는 사치를 싫어하여, 공식 석상에서 항상 낡은 독일 군복을 입었고,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채식주의자 였으며, 정치나 군사와 관계없는 평범한 시민들에게는 예의 바르면서도 털털하게 대했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바그너의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이었으며, 가끔 동네 아저씨나 이발사, 요리사, 운전 기사 등과 함께 아이들 자라는 이야기 따위의 잡담을 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한편 옛날 15세의 나이로 가출했던 아돌프 히틀러의 이복 형 알로이스 2세는 가출 직후 빈의 거리를 떠돌다가 좀도둑질을 하여 감옥에 간 것을 처음으로 평생 감옥을 들락거리며 밑바닥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러다 동생이 총통이 되자, 그 지원을 받아 맥주집을 열었고, 그 맥주집에는 나치의 인사들과 이를 동경하는 손님들이 몰려들어 연일 만원이었다고 한다.
1938년 3월.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이자 실제 모국인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일부로 합병했고, 이상의 일련의 외교적 성과에 따라, 독일의 영토는 두 배 가량으로 확대되었다
1939년 9월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의 스탈린 정권과 손잡고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아돌프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게 된 배경에는 피할 수 없는 정치 외교, 군사적 압박이 있었다는 주장도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압박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극복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었다전쟁에 여러 가지 근거가 있었다 하더라도, 전쟁을 일으킨 결정적인 원인은 아돌프 히틀러의 세계 정복 야심 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발생한 어마어마한 인명의 희생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가 그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앞으로 영원히 독일 역사에서 패배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로마 제국에 버금가는 천년 제국을 건설하여 세계를 지배한다는 그의 아이디어는 훗날 숱한 영화와 만화에서 악역들의 단골 목표로 사용된다.
전쟁무렵의 나치는 그 선전 정책의 일환으로, 음악, 영화, 매스게임은 물론 올림픽과 월드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선동적인 음악과 포스터, 표어 , 예술 경향도 국민 선동에 큰 역할을 했다. 나치는 언론을 철저히 이용했고, 국민 교육 과정과 교과서를 나치 중심으로 확립하였다. 이와 같은 세뇌에 가까운 국민 선전 기술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한 번 재현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독일 정부에 대한 독일국민의 충성심은 대단한 것이 었다. 독일군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싸웠으며, 아녀자나 노약자들도 전력을 다해 협력하였다. 전쟁말기의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서는 히틀러 유겐트라 불리우는 12세에서 14세 사이의 소년 단원들이 주요한 전력이 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그 광기가 발산되는 사건도 심심찮았고, 이에 따른 유태인들이나 동유럽 국민들에 대한 폭행, 학살사건도 잦았다.
전쟁 발발 이후 순식간에 폴란드를 점령한 아돌프 히틀러는 곧 1940년 5월 프랑스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약 20년 전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은 패배를 시인하고 프랑스의 콩피에뉴 특등 열차에서 휴전 협정에 조인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이 휴전 협정에 조인한 바로 그 특등 열차를 박물관에서 끌어내어, 20년전의 바로 그 장소에 갖다 놓고, 프랑스로부터 휴전 협정을 받아내어 20년전의 패배를 설욕하였다. 이로써 아돌프 히틀러의 인기가 최고로 치달은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영국을 압박하여 영국과도 유리한 조건에 휴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윈스턴 처칠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영국에 독일과 끝까지 싸운다는 주전론을 확실히 조성하여 독일과 대항하였고, 독일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한 공군 중심의 영국 본토 공방전에서 패배하여, 그 기세가 꺾였다.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한 아돌프 히틀러는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펼치는 고립속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원이 풍부한 소련을 손아귀에 넣음으로써 그같은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곧 소련을 공격하였다. 초기 소련군에 연전연승한것과는 달리, 소련군은 끈질기게 저항해 왔고, 전쟁이 길어지고 독일군측의 피해가 커졌다. 이 무렵부터, 히틀러는 냉정한 판단력을 많이 잃었고, 결과적으로 독일군은 소련과의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
이를 기회로 미군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의 노르망디를 기점으로 반격이 개시되자, 독일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미군의 물량공세는 압도적인 것이었으며, 그에 비해 독일군의 전력은 약화되어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군대는 무력하게 패퇴를 거듭했다. 결국 전쟁의 패배를 예감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본토를 지키고, 최소한의 양보로 휴전 협정을 맺기 위해, 최후의 반격작전을 기획한다.
발지 전투라 불린 아돌프 히틀러 최후의 반격 작전은 전사에 길이 남는 전략이었으나, 이미 독일군은 너무 약했고, 미군은 너무 강했으므로, 현격한 물량의 차이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아돌프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이 베를린을 완전 점령하기 직전에 부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 자살하여 57세를 일기로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에바 브라운은 정치에는 문외한인 평범한 여자로 히틀러의 여비서였다가, 히틀러의 애인이 되었다. 그는 히틀러와의 동반 자살 하루전인 1945년 4월 29일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히틀러와 결혼식을 올렸다.
히틀러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나의 모든 유산을 나치당에 기증한다. 나치당이 남아있지 않다면, 조국 독일에 기증한다. 조국 독일이 남아있지 않다면, 그때는 나도 모르겠다."
( 이상의 글에서 모든 나이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는 우리 나라의 나이 계산 방식을 사용하여 계산 하였다. )
  • 가격3,300
  • 페이지수54페이지
  • 등록일2002.11.13
  • 저작시기2002.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174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