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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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중세 도시의 기원과 발전

2. 십자군 운동과 도시의 발달

3. 도시의 유형

4. 중세의 도시 발달

5. 중세 도시의 특징과 생활

6. 농업경제

7. 사회조직: 중세장원

8. 농업 생산의 팽창

9. 농민의 생활

본문내용

수 있었다. 그러나, 나쁜 시절에는 그들도 모두 기아선상에 놓였으며, 그들보다 더 가난하고 약한 농민들은 실제로 굶어죽곤 하였다. 영주는 마음대로 형벌을 내릴 수 있었으며, 몇몇 경우에는 사형을 나릴 수도 있었다.
오늘날 자유로운 노동자가 누리고 있는 지위와 비교해 볼 때, 중세 예농의 지위는 끔찍할 정도로 열악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대 세계의 동산 노예에 비하면, 예농의 지위는 신분상의 상승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예농의 일상 생활은 촌락 단위의 공동체 관습에 의해 규제되었는데, 예농은 촌락의 구성원으로서 발언권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관습이 예농에게 토지의 보유권 및 상속권을 보장해 주었다는 것이다.
[3] 농업 생산의 팽창
1. 3포제
3포제에서는 한 포가 휴경되고, 또 한 포에는 가을에 파종되는 겨울 작물이 경작되었으며, 나머지 한 포에는 다른 작물, 대체로 귀리와 콩이 심어졌다.
예를 들어 600에이커의 경작지가 있는 마을의 경우, 농민들은 매년 2포제 아래서의 300에이커 대신 3포제 아래에서는 400에이커를 경작할 수 있었다. 이로써 토지의 생산성이 일시에 3분의 1이 증가하였다.
더구나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매년 두 번씩 휴경지를 쟁기로 갈아야 했으므로, 쟁기질을 해야할 면적도 줄어들었다.
2. 축력(畜力) 이용의 혁신
종래 가죽끈을 맨 멍에 대신에 말의 가슴걸이가 채택되었고, 징을 박은 말굽이 사용되기에 이르렀으며, 병렬 대신 직렬로 말을 연결하는 효율적인 마구 체계가 고안되었다.
[4] 농민의 생활
< 중세 농촌의 봄 여름 가을 겨울 >
농민의 생활이 매일매일의 고된 노동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물론, 노동은 농민의 실생활에서 주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농민의 생활은 계절의 변화와 그에 맞는 노동으로 가장 두드러지게 형성되었다. 그러한 노동의 연속 중간 중간에 교회의 대소 축제가 끼어 있었다. 또한 이교 시대의 자연 숭배와 다산의식으로부터 유래되어 남아있던 옛 관행들도 농민 생활을 좀더 다채롭고 다양하게 해주었다.
교회의 축제 가운데 가장 큰 세 가지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그리고 오순절이었다. 그러나 명망 높은 성인을 기리거나 성 처녀의 특별한 축일들을 기념키 위해 휴일로 된 날의 수는 꾸준히 늘어나, 1년에 50일은 다반사가 되었고, 몇몇 교구에서는 심지어 100일(일요일은 제외)에 이르렀다.
1. 9월
경작 주기는 추수가 끝나 모든 낟알이 다 거두어진 뒤인 9월말에 시작되었다. 성미카엘과 모든 천사의 축제(9월 29일)가 이 때인데, 이 미카엘제가 임대차 계약을 개시하고, 장원의 회계문서를 작성하며, 그 해의 지대나 부과금을 납부하는 날이다.
2. 10월
10월에는 다음 해의 농사를 위해 준비하는 작업인 쟁기질과 써레질, 그리고 대개 밀이나 호밀인 겨울 작물의 파종으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에 오는 것이 이교와 기독교의 전형적인 혼합인 할로윈 축제였다. 많은 종교에서 연말쯤에 사자의 축제를 거행해 오는데, 옛 북유럽에서는 그러한 축제가 11월 1일에 열렸다. 농민들이 어떻게든 사자의 축제를 경축하려 했으므로, 중세 교회는 11월 1일을 모든 성자의 날,11월 2일을 모든 영혼의 날로 명명하였다.
3. 11월
11월에는 쟁기질을 좀 더 하고, 앞서 추수한 곡식을 탈곡하여 쌓아두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11월의 가장 특징적인 작업은 가축도살이었다. 여름에 방목하였던 모든 가축을 겨울 내내 먹여 살릴 만큼 사료가 충분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머지 가축은 11월에 도살하였고, 그 고기는 겨울 양식으로 소금에 절여 놓았다.
4. 12월, 1월
12월은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데 거의 다 들어갔다. 옛 동지 축제에서 유래되고, 4세기 이래로 지금까지 그리스도 탄신일로 경축되어 온 크리스마스는 농민에게 1년 중 가장 큰 축제였다. 이 시기는 축제에 가장 이상적인 시기였다. 저장해 놓은 음식물은 아직 많이 남아있고, 할 일은 거의 없는 농한기였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날이 되면, 농민들은 미사를 마친 후, 대개 영주의 집에 모여 맘껏 먹고 즐겼다. 그 절정은 주현절(동방박사가 찾아 온 것을 기념하는 축제)이었는데, 이 때에 사람들은 그저 먹고 마셨으며, 도덕적인 규제도 전반적으로 느슨해졌다.
5. 2월
2월 2일은 성촉절로 경축되었는데, 이 때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교회를 갔다.
2월에는 농사일의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한다. 3포제의 촌락에서는 지난해에 밀을 심었던 포를 갈아서 봄작물(대개는 귀리, 보리, 콩, 완두콩)을 파종할 준비를 해야했다.
6. 3월, 4월, 5월
3월 22일에서 4월 25일 사이의 어느 일요일도 될 수 있는 부활절축제가 있었다. 부활절 이전의 40일 간은 사순절로서, 이 때에는 다가올 축제에 대비하여 단식과 참회를 행하였다.
부활절 50일 후 중요한 기독교 축제인 오순절이 있었고, 그 사이에는 5월제(이교의 다산을 기리는 축제에서 기원)가 있었다. 이는 전혀 기독교 축제가 아니었으나, 농민들은 아주 즐겁게 경축하였다.
7. 6월
초여름 후 몇 달은 비교적 덜 고된 기간이지만, 그래도, 쟁기질, 김매기, 양털깍기, 퇴비운반 및 뿌리기 등의 일이 끊임없이 닥쳤다. 그리고, 언제나 우유 짜는 일과 가축을 먹이고 돌보는 일이 있었다.
촌락민들은 시간을 내어 하지축제를 경축하였다. 이는 세례요한의 탄생 축제였으나, 실은 이교 시대로부터 유래된 것이었다.
8. 7월
7월은 촌락의 경제에 극히 중요한 건초를 수확하는 달이었다. 겨울 동안 적어도 쟁기를 끌 가축들을 먹일 만큼 건초가 확보되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비참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었다.
9. 8월
8월 1일의 빵축제는 곡물 수확의 개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이제 일할 수 있는 마을의 모든 사람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만 했다. 농민의 주식은 빵이었고, 다가올 겨울에 굶지 않으려면 밀이나 호밀을 충분히 수확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수주일 동안 고된 노동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9월의 언젠가엔 추수가 끝나고, 마을 전체가 영주관에서 수확완료를 축하하는 만찬을 즐기며 쉴 수 있게 되었다. 곧 미카엘제가 다가오고, 또 다시 새로운 1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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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1.25
  • 저작시기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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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1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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