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자본주의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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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16∼17세기의 유럽 경제: 성장과 침제

2.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

3. 절대주의 국가

<각주>

참고문헌

본문내용

적 토대를 갖지 못한 불안정한 지배체제일 뿐이었다. 절대주의 지배세력이 영토확장과 중상주의 정책을 추구하고 대외전쟁에 전념한 것은 이 체제가 갖는 근본적인 불안정성 때문이었다. 특히 무역차액을 통해 부를 취득하려는 일련의 경제정책은 특권 부르주아지를 포함한 절대주의 지배세력의 이해관계에 상응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래로부터 분출해 온 상공업자층에게도 성장의 토대를 제공했다. 절대주의 체제는 봉건세력의 특권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으나 그와 동시에 부르주아지 일반--이들은 조만간 봉건지배세력의 대립물로 전화할 수도 있었다--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절대주의 체제가 지속될수록 그것은 오히려 기존 지배구조의 혁명적 변화 가능성을 증폭시킬 것이었다. 절대주의의 내적 모순은 바로 이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각주>
1) 실증적인 사회경제사에서는 자본주의와 상품화폐경제(또는 시장경제)를 비릇한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래 자본주의를 생산양식(생산의 특정한 상태=생산력, 생산수단의 소유방식 및 생산과정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인간의 사회적 제관계)의 하나로 파악하는 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 이 경우 자본주의는 노동력 자체가 상품화된 생산체계이다. 그러나 노동력의 상품화는 상품화폐경제으 전면적인 발전이 없이는 불가능하므로, 자본주의란 상품화폐경제를 매개로 한 임노동 생산체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이에 덧붙여 양모 생산의 사례를 살펴보자. 에스파냐의 카스티야 지방은 16세기에 상업적 농업이 발전하였고, 특히 양모 수출지로 이름이 높았다. 여기에서 생산된 양모는 네덜란드 저지대로 수출되었으며, 프랑스의 브뤼주(Burges)는 그 중계지였다. 1510-1520년대에 카스티야의 양모 수출은 연평균 1만 3,000마대였다. 그러나 1550년경 그 양은 7만 마대로 증가했다.
3) 1501-1650년간에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귀금속은 금 181.3톤, 은 16,886.8톤이었다. 또 1500년 은과 금의 교환비율은 10.5:1, 1660년경 14.5:1이었다. 다른 모든 조건을 무시하면 1500년 당시 유럽에서 통용되던 기존의 귀금속 양을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기존의 금의 양을 X, 은의 양을 Y라 하면,
10.5X=Y
14.5(X+181.3)=Y+16,886.8
X=3,564.5톤, Y=37,427.3톤.
4) 15세기 말 유럽인의 탐험대와 같은 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명나라 증허(鄭和)의 원정을 비교해보자. 증허는 2만 이상의 수군과 수백 척의 군함, 상선을 거느리고 원정길에 올랐다. 그들의 군함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배수량 수천 톤에 이르렀던 반면, 바스코 다 가마의 기함은 150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럽의 대양 탐험이 경제권의 확대로 곧장 연결된 까닭은 무엇인가. 임매뉴얼 월러스틴은 유럽이 직면한 '절박한' 상황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증허의 원정이 중국 경제권의 확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절박함이 덜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내부식민지를 확장할 여지가 있었지만, 유럽은 한계지마저 고갈된 상태였다. 외부로 진출하는 길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것이다.
5) 이것은 아프리카-영국(리버풀)-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새로운 무역로를 가리킨다. 즉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농산물인 설탕·면화·담배, 아프리카의 흑인노예·상아, 동인도를 통한 인도산 면포 등이 그 주된 교역품이었다. 국제무역에서 영국의 주도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6)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제로 보고 '시초축적'이라 불렀다. 그는 특히 생산수단에서 떨어져나가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노동력을 뜻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주목하면서, 영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그 중요한 계기들을 설명하였다.
7) 1530년, 1535년, 1547년 법령은 모둔 부랑민에게 취로를 강요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자에게 징벌을 가한다는 잔혹한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엘리자베스 치세하의 1572년 법령은 징벌을 더욱더 강화하였다. 예컨대 면허 없는 14세 이상 걸식자는 지난 2년간 그를 고용한 사람이 없을 경우에 채찍질하고 왼쪽 귀에 S자 낙인을 찍었으며, 18세기 이상으로 재범인 자는 2년간 고용한 사람이 없을 경우 사형에 처했다.
8)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시장은 투명한 영역과 불투명한 영역으로 나뉜다. 전자는 경제활동이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 의존하는 영역이다. 후자는 독점 또는 권력과의 유착을 통하여 수요-공급 곡선을 넘어서 고율의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영역이다. 브로델은 자본주의를 이 불투명한 영역에서 예외적으로 높은 이윤을 추구하는 경제활동으로 이해한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이 불튜명한 영역이 좁아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독점과 특권의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뿐, 불투명한 영역 자체가 축소되지는 않았다. 어느 시대나 대자본은 예외적으로 높은 이윤을 보장하는 영역을 추구한다.
9) 플랑드르나 북부 프랑스의 경우 특히 빈촌 지역에서 수공어생산이 활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농촌공업 지역이 모두 이러한 패턴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경우 오히려 켄트, 레스터셔 등 비옥한 농업지대에서도 농촌 공업이 발전하였다. 한계지와 산간지대는 농촌 공업이 발전할 수 있는 하나의 존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외에도 공업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사회제도의 특성에 좌우될 수도 있다.
10) 선대제? 특권상인 고유의 경영방식으로 간주하여 선대제 경영과 매뉴팩처를 대항관계로 파악한 결과, 앞의 것을 상인적 발전의 길, 뒤의 경로를 생산자적 발전의 길로 나누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견해이다. 선대제 방식과 매뉴팩처의 이분법적 구분은 문제가 있다. 농촌 매뉴팩처 경영자도 경영의 일부를 선대제 방식에 의존했으며, 오히려 그 비중이 높을 수도 있었다.
<참고문헌>
김경근,『프랑스 근대사 연구』한울, 1998.
김대환 편역,『자본주의 이행논쟁』동녘, 1984.
돕, M.,『자본주의 발전 연구』이선근 옮김, 광민사, 1980
맑스, K.,『자본론』제1권, 김수행 옮김, 비봉,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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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2.05
  • 저작시기20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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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14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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