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철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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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입장

2. 자유인들에 대한 비판

3. 크로이츠나흐에서, [헤겔 법철학 비판] 수고. 역사에 관한 발췌 노트들

본문내용

위대한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민주주의를 형식적인 인민의 지배가 아니라 실질적인 인민의 지배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 체제를 찾는 것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수고에서 사용된 민주주의 개념이 어느정도 포이에르바흐의 인간학적 입장과 추상적인 인간주의의 영향을 반영하고는 있지만 이렇게 해서 공산주의로의 일보전진이 이루어 졌다.
마르크스 세계관의 유물론적 요소들은 헤겔 관념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성숙되었다. 그는 헤겔 철학 각각의 측면들을 비판하는 것에서 헤겔 철학의 관념론적 토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로 이행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유물론자로 칭하지는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유물론적 입장에서 헤겔을 비판하였다. 그는 관념론적 방법이 사유를 "대상으로부터 전개시키지 않고 반대로 대상을 자기 완결적 사유에 따라, 그리고 논리학의 추상적 영역에서 끝나 버린 사유에 따라" 발전시키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헤겔을 통해, 관념론은 불가피하게 종교와 신화로 귀착된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헤겔의 관념 철학과 보수적인 정치 견해 사이의 연관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헤겔의 체계속에서 프로이쎈 군주제가 어떻게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로부터 절대 이념의 발전단계로 둔갑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바로 이런 식으로 헤겔은 반半봉건적 국가의 다른 속성들―신분제도, 관료제, 장자 상속권 등등―까지도 신비화시켰다.
헤겔 법철학에 대한 논박은 마르크스로 하여금 역사 자체내에서 헤겔의 구조를 반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찾게 하였다. 수고 「헤겔 법철학 비판」은 가설의 분석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의 분석에서 출발하며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의 논리"에서 출발하는 유물론적 경향을 깨닫게 해준다.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라는 문제는 오직 사회의 발전사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일반적인 문제 설정에 만족하지 않고 그 문제를 사적史的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수고 「헤겔 법철학 비판」을 집필하는 한편 1843년 여름(7월과 8월)에 역사를 철저하게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
빽빽하게 쓰여진 다섯 권의 「크로이츠나흐 노트」는 국가론과 국가의 역사, 그리고 개별 국가들―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스웨덴―의 역사에 관한 논문들에서 발췌한 수많은 글을 포함하고 있었다. 특별히 마르크스는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사에 관한 몇몇 독특한 연구들, 그중에서도 독일의 저명한 역사가인 빌헬름 박스무트의 연구에 주목하였다. 마르크스는 그 연구에서 다루어진 사건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한편으로 그 사건이 당시 사회의 형성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발전의 주요 원동력을 이 뛰어난 선례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탁월한 이탈리아 역사가 니콜로 마키아 벨리,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샤를르 드 몽떼스끼외와 쟝쟈크 루소, 반동적 낭만주의 시대의 이론가 프랑소아 르네 드 샤또브리앙과 유스투스 뫼저 등이 마르크스가 그 당시 숙독했던 저서의 저자들에 속한다.
이 발췌문들과 그것에 대해 작성한 내용 색인의 성격을 보면 마르크스가 당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주제들에 대해 작성한 내용 색인의 성격을 보면 마르크스가 당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주제들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들 중에는 마르크스가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였는가를 분명하게 알려 주는 몇몇 경우를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그 발췌 노트들에서 봉건적 소유의 문제와 그것이 사회의 계급 구조와 정치 제도들에 미친 영향에 주목하였다. 그는 프랑스 부르조아 혁명사를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상이한 게급들의 이해 충돌과 투쟁이 혁명적 사건의 전개에 미치는 영향을 좀더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부르조아지의 정치가 경제적 요인, 특히 소유 관계에 의해 좌우됨을 밝혀 내고자 한 마르크스의 각별한 노력을 엿볼수 있다. 그는, 법 앞에서의 만인의 형식적 평등이 아니라 소유 관계의 근본적인 변화에서 발생하는 진정한 평등이 부르조아 혁명으로는 보장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부분들을 발췌하였다.
내용 색인 역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견해가 관념적인 사회 이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뿐 아니라 역사상의 현상들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려는 특유의 노력을 통해 형성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소유권과 그것의 귀결"이라는 주제가 내용 색인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 제목하에 소유관계에 정치가 종속됨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요약하여 놓았다.
역사의 교훈들을 연구하면서 그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회라 불리울 수 있을 만한 사회 체제로 이행하기 위한 길을 모색하였다. 마르크스는 이전의 혁명이 지닌 한계를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혁명적 민주주의를 넘어서서 공산주의적 견해를 갖게 되었다. 다른 한편 역사연구는 그의 이론적 연구를 과학적 토대 위에 세웠을 뿐 아니라, 그가 공상주의에 전염되지 않도록 면역시키는 역할까지 하였다.
크로이츠나흐에서의 몇 달간은 마르크스의 세계관 발전에 중요한 시기였다. 엥겔스가 여러해 뒤에 기술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그 당시 "헤겔에 의해 '구조의 결정'으로 묘사된 국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그토록 무시했던 '시민사회'가 인류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 열쇠를 제공해 주는 영역이 될 것이라는 통찰"에 이르러 있었다.
헤겔의 법철학과 그의 관념론 일반을 포괄적으로 비판하고, 역사상의 경험들을 일반화시킴으로써, 그리고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적, 인간주의적 사상들을 알게 됨으로써 마르크스의 견해는 더욱 뚜려소한 유물론적 각인을 간직하게 되었고 유물론적 경향이 주조를 이루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벙법을 혁명적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던 위대한 변증론자로서 지금까지의 사회가 근본적인 변혁의 필연성을 자체내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변혁의 방향을 아주 막연하게("민주주의"의 혹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이상적 국가로) 표현했을 뿐이었으며 이 변혁을 수행할 수 있을 만한 사회적 힘을 먼저 찾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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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2.12.09
  • 저작시기2002.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14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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