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서문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32
  • 33
  • 34
  • 35
  • 36
  • 37
  • 38
  • 39
  • 40
  • 41
  • 42
  • 43
  • 44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 53
  • 54
해당 자료는 10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0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제 1 부 시무언(是無言), 한국 기독교 신비주의자(Victor Wellington Peters)

I. 서문
제 1 장 아버지와 가족
제 2 장 어머니의 신앙
제 3 장 상한 몸을 이끌고
제 4 장 그리스도의 몸을 치유하다
제 5 장 죽음에서 일어나다
제 6 장 덤으로 산 시간
제 7 장 내 양을 찾다
제 8 장 다른 양
제 9 장 광채
제 10 장 황혼
제 11 장 샛별
제 12 장 시무언의 열정
이용도 목사를 기억하며

제 2 부 이용도신학의 재조명
제 1 장
논찬
논찬
제 2 장 피도수 선교사가 본 거룩한 열정의 사람 이용도(이상윤)
논찬: 이상윤 목사의 글에 대한 논평(심광섭)
제 3 장 시무언 이용도의 예수론(이세형)
논찬: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예수론을 읽고(이정배)
논찬: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예수론`-논평과 제안(최인식)


역자 및 기고자 소개

본문내용

. 1928년 2월 10일 금요일 저녁, 나는 중국 본토 선교회의 미국담당자를 만나보러 갔다. 그는 프린스톤에서 살고 있으면서 학생부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선교사역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반가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를 친절하게 맞아 주셨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중국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반쯤 열린 문으로 들어갈 생각을 마시오." 그는 계속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움직일 분비가 되셨다면,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은 바로 이것이오. 마치 중국인이 손님에게 안녕인사를 하듯이, 만만소(천천히 가시오). 그것이 당신에게 주는 내 충고요."
이틀 후, 2월 12일 일요일 밤에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조선(Korea)에 복음전도자로 가게 될 것이다." 나는 로스앤젤레스 지역에 살고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그들은 답장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네가 조선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한 달이 지나 감리교 선교국에서 전보가 왔다. "청원이 받아들여짐-일하시오-조선(한국)에서."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나의 모교회(母敎會)에서 나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문은 활짝 열렸다.
1928년 7월 31일, 나는 태평양을 가로질러 조선으로 갈 배 위에 있었다. 나는 8월 29일 부산에 도착했다. 나는 조선이 내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이라고 생각했다.
한인수 목사는 나에게 조선어를 가르칠 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양주삼과 함께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제 일반에 속해있었다. 약 두 달 후에 나는 처음으로 조선어로 설교를 했다. 마태복음 2:10을 본문으로 나는 용산 감리교회에서 설교를 했다. 양주삼 박사는 나에게 조선 이름을 선사했다. 나의 한국이름은 피도수(皮道秀)였다.
12월에 나는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솜이 든 조선옷을 입기 시작했다. 일년 동안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일한 후에 나는 사직동에 있는 조선인 집으로 이사갔다. 서울 지역의 선교를 위한 내 일자리는 종로 근처에 있었고, 서울 동부 지역의 선교를 위해 의정부에서 선교사역을 했다. 나는 신설리와 성북동에서 천막집회를 가졌고 그 두 곳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1934년에 미국에 돌아 온 후에, 감독은 나를 1년간 개성 선교사로 파송했다. 한 시골교회에서 부흥회가 있는 동안 나는 빨갛게 달아오르는 열로 심하게 앓았다. 1935년에 나는 철원지역으로 파송받았다. 김화교회에 담임목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서 살기 위해 갔다. 그러나 나는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대구에서 만주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중국의 북경까지 돌아 다녔다.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보내준 돈으로 나는 많은 교회를 세웠다. 우리는 그 당시 약 200불 정도면 시골에서 조그만 교회를 지을 수 있었다. 나는 김화에 돌과 타일로 된 지붕이 있는 조선식 교회를 지었다.
한흥복은 한 달에 두 번씩 한 여자 선교사를 대동하고 김화를 방문했다. 금요일 저녁, 그녀는 청년부 모임을 인도했고 토요일에는 여자들을 위한 모임을 인도했다. 내가 그녀에게 일요일에 독창을 해주기를 요청했을 때, 그녀는 나에게 기타를 쳐달라고 부탁했다.
정남수는 김화에서 천막모임을 인도하였다. 그 때 그는 내가 한 젊은 여인을 좋아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중에 한흥복이 아직 미혼이라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몇 몇 남자들이 그 당시 그녀와 결혼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달 동안 그녀에게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그 후 짧은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단순히 "내가 지금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 그 편지 내용의 전부였다. 나중에 그녀는, "주님께서 나에게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말했다.
우리는 김화에서 1938년 2월 12일에 결혼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조선에 보낸 지 만 10년 후의 일이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호와로운 결혼식으로 인해 빚을 지지 말 것을 충고하였기 때문에, 국수와 보리차로 결혼식을 치렀는데 단 10원이 들었을 뿐이었다.
흥복의 한 친구가 이화여대에서 우리를 찾아와서 조선잡지(Korean magazine)에 우리에 관한 기사를 잘 써주었다. 우리의 첫 딸이 1939년 8월 28일에 태어났다. 우리는 시편 84:11의 말씀에 따라 그 애의 이름을 영은이라고 지었다.
나는 항상 한국에서 살기를 원했다. 그러나 1940년에 미국 정부는 임박한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고 곧 한국을 떠날 것을 충고했다. 당시 경찰들은 조선사람들이 미국인과 같이 있는 것에 의심을 품었다. 미국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병석에 있었기에 우리가 미국에 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1941년에 우리는 슬픈 마음으로 한국을 떠나면서 곧 다시 돌아오게 되기를 희망했다.
제 2 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우리의 귀환은 지연되었다. 왜냐하면 나의 아내 흥복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동란이 일어났다. 김화는 폐허가 되었다. 1955년까지 어떤 가족도 되돌아 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때까지 나는 어떤 선교단체와도 연락이 되질 않고 있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인교회와 더불어 교회사역을 하고 있었다. 우리 자녀들은 이미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1976년 이화여대에서 개교 90주년 기념을 위해 우리를 초청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한 달 동안 즐거움을 만끽했다. 맹기영, 이호빈, 김광우, 한영선, 박창혁 박사, 그리고 김옥길과 같은 친구들이 우리를 왕과 왕비처럼 맞아 주었다. 장미꽃이 만발했고 한국의 국기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한국은 이전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1941년에 서울에는 14개의 교회가 있었다. 이제 400개 이상의 교회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한국을 기억하고 싶다. 나는 이 글을 마치면서 이용도 목사의 자부와 손자들의 안부를 묻고 싶다.
1996년 가을에
피 도 수
Victor Wellington Peters

키워드

  • 가격3,300
  • 페이지수54페이지
  • 등록일2003.02.08
  • 저작시기2003.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098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