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의 외교관계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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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임진왜란 전의 삼국의 정치상황

Ⅲ. 임진왜란의 발발

Ⅳ. 임진왜란의 종결

Ⅴ. 결론

본문내용

이러한 행위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왜적의 세력권 안에서 발생했고 직접 왕정의 전복을 겨냥한 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송유진·이몽학의 난은 규모나 조직 면에서 양상이 판이하였다. 주모자들은 정면으로 현 왕권을 타도하고 새 국가를 수립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또한 두 반란은 왜군이 화의를 조건으로 이미 남쪽으로 철수해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충청도 지역이 중심이었다. 이런 점에서 임란 초기 감사나 수령들의 수탈이나 혹사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이나, 왜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바라만 보다가 흩어지는 帥臣들을 증오한 농민들의 이반과는 성격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이들 두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사회에 던진 충격은 대단히 컸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지배층에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가 군공이나 납속을 통하여 주어지기는 했으나 난국 타개가 목적이었으므로 그 문이 넓지는 않았다. 壬辰亂 초기에 의병 활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대부분 지배층이어서 그 밑의 의병들은 전공이 표면에 드러나기 어려웠다. 그나마 의병이 해체되자 한가닥 신분 상승의 기회마저 끊어졌다. 납속의 길도 쉽지는 않았다. 정부에서 발표한 납속 사목은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아사 상태에 처한 양민들로서는 납속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반란의 주도자가 의병 활동하던 사람이 아니면 납속의 임무를 띠고 활약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많은 시사를 준다고 하겠다. 전쟁에는 많은 인명의 손실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죽지 않고 살아 남은 자는 전란을 통해 많은 것을 터득하고 배우게 된다. 송유진과 이몽학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세력이 급속히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을 통하여 많은 것
을 깨달은 피지배층의 가담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한편 송유진의 난과 이몽학의 난에 끌려들었다가 죽음을 당한 李山謙과 김덕령金德齡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남는다. 당시 사회적인 추세로 보아 중앙 정부가 반적의 입을 빙자해서 고의적으로 만든 사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이산겸과 김덕령은 끝까지 의병 활동을 하여 중망이 높고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이들을 처형한 것은 그들이 의병 세력의 기반을 믿고 혹 동요되는 민심을 이용하여 반란이라도 획책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취해진 조처였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結論
전후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등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 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田野가 荒廢化되었다. 社會的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庶椧許通, 鄕吏의 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史書를 보관한 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한편, 兵制의 재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戚繼光의 ≪기효신서 紀茸新書≫를 얻어서 절강무예(浙江武藝)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였다. 1594년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三手兵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속오군(束伍軍)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여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로서는 종래의 주무기인 궁시창검(弓矢槍劍)·총통(銃筒)·완구(碗口)·화전(火箭) 외에 난중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가 발명되었다. 또 항왜(降倭)로부터 조총 제조와 염초 자취술을 익혀 실전에 활용했으며, 불랑기(佛狼機)를 모조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난을 통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고 자아 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의 원군 파견으로 숭명 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중에 명군에 의하여 關羽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난 뒤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關羽廟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무리한 전쟁을 오래 끌었던 관계로 국민 생활이 피폐해졌고, 침략군 중에는 기아를 못 이겨 조선에 투항한 자가 많았다. 또한 일본 국내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도쿠가와(德川家康)가 국내 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또, 조선에서 많은 백성을 포로로 끌고가서 강제로 경작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인 포로 가운데, 陶工들의 도자기 제조로 일본 도자기업에 큰 발전을 보았으며,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활자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고,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典籍을 가져가서 일본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킨 탓에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의 여진족에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청 교체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와같이,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參考文獻
▶單行本
·한명기 「壬辰倭亂과 韓中關契」역사비평사
·강만길「朝鮮후기 硏究의 現況과 課題」창작과 비평사
·양재숙「다시 쓰는 임진대전쟁」 고려원
·이장희 「壬辰倭亂史 硏究」 아세아 문화사
·김문길 「壬辰倭亂은 문화전쟁이다」도서출판 혜안
·최영희 「임진왜란-교양국사총서 7」『세종대왕기념사업회』1999년 11월
·서필량 「임진왜란」 『서문당 』,1994년, 09월
▶論文
·권중헌 「壬辰倭亂을 중심으로한 三國의 外交關係」
·이헌종 「명사접대고」『향토서울』12, 1961
·이존희 「조선 전기 대명서책무역」『진단학보』44,1976
·박원호 「명'정난의 역' 시기의 조선에 대한 정책」『부산사학』4,1980
·김한식 「명대 중국인의 대한반도 인식」『동양문화연구』8, 경북대,1981
·한상권「16세기 대중국 사무역의 전개」『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1983
·김구진 「조선전기 한중 관계사와 시론」『홍익사학』,4, 1990
·민덕기 「조선후기 조·일강화와 조·명관계」『국사관논총』12집,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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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3.26
  • 저작시기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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