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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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동학농민운동과 갑신정변`의 비교

* 서론
* 갑신정변
1. 갑신정변
2. 정변의 실패

* 동학 농민 운동
1. 농민 전쟁의 배경
2.농민전쟁의 전개과정
3.농민전쟁의 역사성

***참고자료***

본문내용

정개혁안이 실천되어갔다.
폐정개혁안은 동학교도와 정부와의 서정(庶政) 협력, 탐관오리와 횡포한 부호, 불량한 양반에 대한 엄징, 노비문서 소각,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청춘과부의 개가 허용, 무명잡세의 폐지, 문벌타파와 인재등용, 일본과 내통한 자 엄징, 공사채의 무효화, 토지의 평균분작 등이었다.
그러나 농민군이 정부군과 화약을 맺은 것은 당초 목적했던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들을 축출"하는 일을 포기한 것이며, 또한 정부로 하여금 외국군을 끌어들일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결과가 되었다. 정부는 전주화약이 성립되기 10일 전부터 이미 청국에 대새 농민군 진압을 위한 원병 교섭을 벌이고 있었다.
농민전쟁의 마지막 제4단계는 제2차 농민전쟁기이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적극적으로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는 한편, 조선정부가 일본군으로 하여금 농민군을 '토벌'하게 하려 하자 이에 대항하여 약 1만명의 농민군이 다시 일어났다. 다시 일어난 농민군은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논산에 집결하여 대본영을 설치하고 공주 우금치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패했다. 농민군은 곧 전라도 지역으로 후퇴하여 재기를 계획했으나 전봉준이 체포되어 전쟁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3.농민전쟁의 역사성
갑오농민전쟁을 조선왕조 정부는 '동학란' 이라 불러 하나의 종교단체가 일으킨 반란으로 성격지으려 했다. 그러나 뒷날의 역사학은 그것을 동학교도만의 반란으로는 보지 않고 동학교단의 지도에 농민이 참가해 일으킨 전쟁 내지 혁명으로, 혹은 동학교단보다 농민 지도층의 주도로 폭발한 농민전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제1차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동학교주 최시형이 각 지방에 "작폐(作弊)를 금지한다"는 통문을 보냈다. 전봉준이 제2차 농민전쟁을 일으키면서 교단의 주류인 북접에 대해 연합을 제의했으나 북접은 "도(道)로써 난(亂)을 지음은 불가한 일이다. 남접의 전봉준과 서장옥은 국가의 역적이요 사문의 난적이라. 우리는 빨리 그들을 공격하자"라는 통문을 각 지방에 보냈다. 이런 사실들이 이 전쟁을 '동학란'으로 볼 수 없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전쟁기간을 통해 농민군 쪽이 내놓은 폐정개혁안이나 집강소 운동 등을 통해 추출할 수 있는 이 전쟁의 성격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 전쟁의 목적이 조선왕조 봉건체제 자체를 완전히 청산하려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고 봉건체제 안에서 개혁을 이루려는 데 한정되었으나, 이 개혁은 결국 봉건체제 자체의 청산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둘째, 이 전쟁은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고 국권을 수호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반봉건·반외세 투쟁 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갑오농민전쟁은 문호개방 후 한층 더 심화도니 조선왕조 사회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 위에서, 밖으로 외세에 대항하면서 안으로 봉건 지배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넓은 의미의 농민층이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안으로 봉건적 지배계급과 밖으로 외국 침략세력의 두 적에게 함께 대항하여 싸우는 전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그 두 힘의 연합세를 이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갑오농민전쟁을 문호개방 이후 최초로 기도된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이었던 갑신정변과 비교해보면 그 역사성이 한층 더 뚜렷해진다. 갑신정변의 개혁안은 지주적 토지소유를 인정한 지조법의 개혁과 문벌 타파, 과거제도 폐지에 머물렀다. 이에 비해 갑오농민전쟁은 농민적 토지소유 실현의 과도적 단계인 '토지의 평균분작'을 요구했고, 노비문서의 소각을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이 가지는 역사적 한계성도 또한 뚜렷하다. 사회·경제면의 높은 혁명성에도 불구하고 권력구조상의 개혁대상은 중앙정부의 '권귀(權貴)'에 한정되었다. 조선왕조 자체나 왕권을 타도 대상으로 삼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전주를 점령한 농민군이 정부군과 화약을 맺고 전라도 일대에 한정된 집강소 운동을 통한 전쟁이념의 실천에 만족한 것도, 그 때문에 정부에게 외국군을 끌어들일 시간적 여유를 주게 된 것도, 왕조와 왕권까지 부정하지 못한 농민군 지도부의 정치의식의 한계성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농민전쟁이 가지는 이같은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또 외국의 간섭으로 인한 전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갑오농민전쟁은 조선왕조 정부로 하여금 갑오개혁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비록 농민군이 요구한 '토지의 평균분작'과 같은 문제에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해도 갑오개혁에서 전제 군주권이 일정하게 제한되고, 노비제도가 전면적으로 폐지되었으며, 무명잡세의 정리에 일정한 진전이 있었다.
농민전쟁의 실패로 갑오개혁은 농민군의 지도층이 아닌 온건한 사무개화파가 주도하게 되었다. 이는 갑오개혁의 주체성과 혁명성을 크게 제약하는 반면 그 타율성과 타협성·개량성을 그만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또 이 시기의 역사가 근대 민족국가 형성에 실패하고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는 하나의 중요한 갈림길이 되었다.
갑오농민전쟁은 갑신정변과 같은 부르주아적 생각을 가진 귀족출신이나 뒤에 나타날 독립협회 운동과 같은 근대적 지식인 및 도시민 중심의 운동이 아니었다. 사회·경제적 처지가 빈농과 같은 상태로 떨어진 일부 농촌지식인들에 의해 지도되고 여기에 광범위한 농민층이 참가한 농민전쟁이었다. 그러나 그 역사적 위치는 갑신정변 이후 여러 사회계층이 참가하여 추진되던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농민전쟁이 끝난 후 그 잔여세력의 일부는 뒤이어 일어난 봉건유생 주도의 초기 의병전쟁에도 참가했으나 그 주체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농민전쟁의 역사적 지향은 대한제국 시기의 각종 민란이나 영학당·활빈당 등의 활동에 계속 이어져 반외세·반봉건 민중운동으로 발전해갔다.
***참고자료***
한국사11/ 1994/한길사
국사下/ 국사편찬위원회/1996/교육부
고쳐 쓴 한국근대사/ 강만길//1994/창작과 비평사
한국역사연구회/한국역사/1992/역사비평사
한영우/다시 찾는 우리역사/1997경세원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상, 하 국사편찬위원회 1998
교실밖의 국사여행 역사학 연구소 지음 사계절 출판사 1993
시민을 위한 한국역사 창작과 비평사 1997
역사신문 제5권 사계절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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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3.05.31
  • 저작시기2003.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3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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