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대]-한국, 한글, 중국서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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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서예의 기원과 발전


2.한국 서예사

①삼국시대
②통일신라시대
③고려시대
④조선시대


3.한글 서예사


4.중국 서예사

①한자(漢字)의 기원과 문자 자료의 등장 이전
②문자자료의 등장과 대전(大篆)의 성립
③서체의 혼란과 문자 통일
④예서의 진전(秦篆)과 초서(草書)의 등장
⑤일대 전환기

<참고 문헌>

본문내용

연간 [147 189]의 40년간은 그 전성기로 근 2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원석이 백점이상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서예의 발전을 촉구하게 되었다.
비석의 문자로는 한대에 들어와 완성되어 통용서체가 되었던 예서가 새겨졌고, 예서는 예술적으로 점점 그 아름다움을 발휘하였다. 일반적으로 비석은 인물의 공덕을 표창하여 널리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당시 유교사상의 도덕주의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그 문장이나 서법에도 충분한 주의가 기울어져 훌륭한 문장과 아름다운 글씨가 추구된 것은 당연하다. 한 비는 어느 것이나 독자적인 서풍을 가진 뛰어난 것뿐이고, 전형적인 한예(漢隸)로 쓴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비석의 유행도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처음의 입지취지와는 동떨어져서 거짓 행적을 기록하는가 하면, 가문을 과시하는 호화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되자 현제때 [205] 에 석실(石室), 석수(石獸), 비명(碑銘)등의 제작을 모두 금지시켰다.
2) 종이의 발명
서기 105년에 환관인 채륜(蔡倫)이 종이를 발명하였는데, 그동안 실용적으로 문자기록에 사용하던 목간이나 비단 의 단점으로 인하여 종이는 이것들에 대체하여 서서히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종이를 사용하게 되면 무엇보다도 편리하기 때문에 일반 민간 에 빠른 속도로 번져갔을 것이다. 종이가 발명되면서 척독(尺讀:짧은 편지)에 이를 사용하는 일이 생겼으며, 대체로 여 기에 초 서로 서사를 한 것 같다. 이로써 초서가 종이의 보급과 함께 발달하였는데, 이는 예서가 한비의 유행으로 발달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3)서가(書家)의 등장
진 이전에는 글씨의 공졸(工拙)을 비교하지 않았으므로 서학(書學)이나 서법의 설이 없었으나, 한대에 이르러 비석이 성행하면서부터 글씨의 심미적(審美的) 요구가 이어져 서법의 전승(傳承)에 계통을 찾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전문적 인 서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여기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조희(曹喜)와 두도(杜度)이다. 두 사람은 장제(章帝) [75 88] 때 활동하던 인물이며, 조희는 전예(篆隸)에 능하고 두도는 초서에 능했다고 한다. 이들 이후에 나타난 서가를 보면 두사람중의 어느 한편에 속해있다. 그래 서 전자를 전예파, 후자를 초서파(혹은 행초파)라 했는데, 전예파는 채옹(蔡邕)이, 초서파는 장지(張芝)가 대표하고 있다. 두세 력으로 구분되어있던 것이 점차로 시대가 지날수록 초서파가 세력을 증대해갔다. 종이의 보급과 함께 초서가 새로운 혁신적인 글씨로서 일반 민간에서 환영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한대에 서가가 전예파와 초서파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남북 조사대의 북파의 비(碑)(예서, 해서), 남파의 첩(帖)(행, 초서)이 두파의 원류가 될 수 있었다는 데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4)설문해자(說文解字)
후한때에는 중국 언어학사상 불후의 명저일 뿐만 아니라 고문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기초 자료가 되어 서예사에서도 귀중한 책이 되는 '설문해자'가 편찬되었다. 설문해자는 허신(허愼)이 서기 98년에 초안을 잡아 100년 에 완성하였는데, 모두 14편으로 9,353자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을 만든 목적은 학자들의 그릇된 견해를 풀어주고 성인들이 문자를 만든 신성한 목적을 알리기 위해서다. 설문해자에는 완전하게, 그리고 계통적으로 소전을 보전하고 있고 당시 통용하던 고 문, 주문 속체(俗體)가 포함되어 있다. 설문해자는 설문내의 소전과 일부 주문의 형체로 더 오래된 문자를 해독할 수가 있으며, 오늘날 현존하는 고서를 정 리, 주석하는데 있어서도 반드시 갖추어야할 책이다. 또, 서예 자료에 있어서는 갑골복사(甲骨卜辭)와 종정관지(鐘鼎款識)를 연 구할 때, 설문해자의 도움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진한이래 간책백서(簡冊帛書)의 정리, 해독에도 설문 해자는 사용된다. 실례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마왕퇴 출토의 백서죽간은 설문해자를 적용하여 해독할 수 있었다.
5)각 체의 성립
후한대에 들어서자 많은 서가들은 서예의 여러가지 변형체를 발전시켰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오늘날 통용되는 모든 서체 가 성립된 것 같다.
앞서 이야기됐지만, 초서는 진의 예서가 간략화되어서 이룩된 것으로, 원래 한자의 발전으로 인한 자연적인 산물이다. 진대에는 소전을 쓴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통용되던 글씨는 오히려 초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돈황의 한간(漢簡)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따라서 당시의 초서를 정확히 부른다면 초예(草隸)라고 할 수있으며, 그 후의 초서를 금초(今草)라고 할 수 있다. 후한의 장 제(章帝)때 이르러 초예에 능한 '두도'가 나왔으나 그의 유품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후 '장지'가 초서를 더욱 발전시켜 금초 를 이룩하였다.
또, 한대의 말기가 되어서는 우로 삐치는 파책의 필법이 대단히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전서와 예서의 둥근 맛이 있는 형을 받아들여서 해서를 만들었다. 해서는 예서의 사각형과 정확성이라는 기본 성격 과 장초의 간결성과 속필(速筆)을 결합한 서체이다.
그리고, 해서의 출현과는 전후구분이 어려운 행서가 등장하였는데, 행서(行書)는 후한의 유덕승(劉德昇)이 간편하고 쉽게 쓰고 자하여 만들었고, 예서의 형식을 완전히 벗어난 진보된 형태이다. 예서의 모난 각(角)이 죽었고 운동감과 경쾌한 맛이 가미되었다. 행서의 획과 자형은 해서와 동일하나 속필로 썼다는 사실이 다르다. 아마도 해서와 행서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 유행했을 것이고, 해서가 발전하고 분화됨에 따라서 그 변형체는 해서와 행서의 혼합체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 통용되고 있는 서체들은 한대에 이미 모두 만들어졌다. 그만큼 한대 특히, 후한시기는 중국서예사상 매우 중요 한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 문헌>
서명
저자
출판사
설문해자통론(說文解字通論)
육종달
계명대 출판부
한국 서예사
김기승
정음사
전초입문(篆草入門)
권영원
오성사
중국회화사
김종태
일지사
한문통석(漢文通釋)
조종업
형설출판사
서예기법
두충호, 정철재
미술문화원
서예술학
정충략
미술문화원
서예의 역사
석지연
열화당
서법론 연구
박병천
일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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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3.08.18
  • 저작시기2003.0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4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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