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소재의 「도화녀, 비형랑」조를 통해 본 진평왕의 즉위과정과 동왕대 초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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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유사소재의 「도화녀, 비형랑」조를 통해 본 진평왕의 즉위과정과 동왕대 초기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목적

2. 「도화녀, 비형랑」 조의 내용

3. 비형랑의 정치적 성향

4. 즉위초 왕실의 지지세력
1) 동륜계.
2) 근시직
① 사인
② 시위직
③진골귀족

5. 제도의 정비
1) 관제의 정비
2) 관제분업체제의 확립

6.결말

본문내용

)을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고 승부령 1인을 두었다.
그리고 586년에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고 예부령 2인을 두었으며, 591년에는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
2) 관제분업체제의 확립
여기서 眞平王대 초기인 580년대에 위화부·조부, 그리고 예부와 같이 중앙관부 중에서도 핵심적인 구실을 담당하는 관부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이 시기는 신라의 관제발달사상 발전기로서 새로운 행정관부의 창설뿐만 아니라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소속 관원수를 규정함으로써 조직화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진흥왕대의 정복국가체제에서 관부 정치 체제로의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眞平王대 말기인 622년 2월 궁정관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內省私臣)을 설치하였고, 진지왕의 아들 金龍春을 처음으로 임명하였다. 이밖에도 623년 정월 병부에 대감 2인을 두었으며, 624년 정월 시위부(侍衛府)에 대감 6인, 상사서(賞賜署)와 대도서(大道署)에 대정(大正) 1인을 각각 설치하였다.
다음으로 584년에 건복(建福)이라고 개원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천명하는 한편, 581년에 건국하여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분열기를 극복하고 589년에 통일왕조로 등장한 중국 수나라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6.결말
첫째, 비형랑은 후대에 용춘의 행적을 상징적 설화로 꾸미면서 가공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비형랑은 초기 용춘의 정치행적을 살피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데 비형랑과 진평왕과의 관계나 또는 용춘이 진평왕의 사위였다는 사실에서, 진평왕대 초기에 왕위를 장악한 동륜계는 사륜계와의 협조로 왕권의 안정을 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진평왕은 즉위초에 왕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뜻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셋째, 진평왕대의 관제정비는 그 전대의 그것과 비교하여 큰 변화를 보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전제주의로의 개혁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진평왕은 비교적 긴 기간을 왕위에 있었지만, 초기에 그가 행한 왕권강화를 위한 개혁조치는 실패로 기울었다. 다만, 후기의 개혁 조치는 오히려 전제주의를 확신하려는 성격을 더욱 뚜렷이 하고 있지만 용춘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후 세력기반을 확대시킨 사륜계는 진덕왕대 전제주의로의 개혁을 단행하면서 왕위를 획득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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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3.10.16
  • 저작시기2003.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26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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