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치,문화,지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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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러시아(정치,문화,지리,역사)

1. 정치문화

2. 러시아의 정치문화

3. 최초국가의 건립과 활동

4. 끼예프公國의 제 구조

5. 지리적 조건하의 문화유형
1) 크기와 위치
2) 지형조건
3) 기후조건
4) 식물대
5) 이동조건
6) 민족적 조건

6. 정치적 문화유형
1) 비잔틴과 따따르족의 영향
2) 서구의 영향
3) 정치문화

본문내용

정치문화의 특징은 "분열"로 대표되고 있다. 모스끄바公國의 출현 이후 농업에 의존한 사회구조적 재편 속에 전제주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렇게 일원적인 체제 구축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관여한 상부구조내의 분열상이 끊임없는 극열한 양상을 보여왔다
러시아의 분열상은 끼예프公國期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권력승계 시에 벌어지는 형제들간의 치열한 싸움을 동반한 분열현상이 일반적이다.
이 같은 분열의 원인은 지리적 악조건과 외세의 빈번한 수탈 경험 속에서 형성된 안보의식의 산물이며, 교육결핍 속에 형성된 본능적 행태의 결과로 보인다. 더욱이 분열현상이 향후 러시아사에서도 지속되고 있음은 상기에 지적한 원인이 제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에서 강력한 통합능력을 갖춘 군주는 공통적으로 힘에 바탕을 둔 폭군들이었다. 때문에 지도력에 틈과 취약점이 보이면 귀족들간에 암투를 동반한 권력투쟁의 노골화 현상이 관례화 되어왔다.
모스끄바公國 期는 전제주의로 인한 大公 내지 짜리(황제)의 권한이 강화된 시대였다. 전제주의는 분명 외세의 영향이다. 그러나 이를 러시아에 정착시키는데는 상당한 진통이 뒤따랐다. 원인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분열이 일반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세배격이 국가적 최대 과업인 상황에서 불가피했던 통합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에 의존한 토지제도 개편에 착수했다. 즉, 끼예프공국시부터 분열의 온상이었으며 세습적 사유지인 보뜨취나(votchina)를 폐지하고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의 봉급형식으로 배분되는 빠몌스찌예(pomestie) 방법을 채택했다. 그러나 구 귀족들의 반발도 컸기 때문에 결국 이반4세가 오쁘리치니나(Oprichnina)라는 황제의 특수한 사적 경찰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분열세력을 배제하고 통합을 이룬 것이다.
로마노프왕조 기에서도 대표적인 경우를 뾰뜨르대제 통치시 볼 수 있다. 뾰뜨르는 근대화 과제를 최상목표로 정한 뒤 우선 귀족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헌신적 국가봉사를 통해 개인의 富를 증진시킬 수 있다는 논리의 국가개념 정의로 강권을 휘둘렀다. 다시 말해 근대적 발전수준을 인정하면서도 힘에 바탕을 둔 통합을 통해 명실공히 러시아를 유럽세력으로 부상시키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분열의 구체적 실체 속에는 이기적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즉, 짜리의 정상적인 체제유지 기에는 비굴하고 절대 굴종적인 귀족들의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절대군주 死後에 반복적으로 발생한 귀족들의 권력투쟁 양상은 공동이익을 저버린 극히 사적 이해추구에 집착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절대권을 행사한 이반4세 사후에 벌어진 권력투쟁은 이반4세의 아들 효도르(Fedor)를 법적으로 계승했으나 그가 간질병자이며 병약하여 그의 삼촌 니끼따 로마노프(Nikita Romanov)가 섭정정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니끼따 로마노프의 권력은 곧 그의 형 바리스 가두노프(Boris Godunov)에게 넘어갔다. 그후 왕권에 대한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 야기된 가짜 드미뜨리(Dimitry)사건으로 폴란드에 주권을 상실 당할 위기에 빠지기까지 했다. 그후 폴란드의 사주를 받고 있던 가짜 드미뜨리를 몰아내고 집권한 바실리 슈이스끼(Vasily Shuisky, 1606-1610)는 이반 볼로뜨니꼬프(Ivan Bolotnikov)가 주도한 농민·농노의 난을 진압할 목적으로 1608년 스웨덴에 구원요청을 함으로써 외세의 개입을 자초했다. 결국 스웨덴인들이 1609년 스몰롄스끄(Smolensk)를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1610년 모스끄바에서 또 다른 난이 발생하여 바실리 슈이스끼를 폐위시킨 후, 귀족들이 장악하고 있던 정부가 폴란드의 황태자 라디슬라우스(Ladislaus)에게 자신들의 조력과 동의하에 통치하는 조건을 붙여 러시아 짜리(황제) 자리를 제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러시아에서 발생한 권력투쟁은 민족 공동 운명체 의식마저 저버린 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알례쏀이(Alexis Ⅰ, 1645-1676) 사후 신체가 허약하고 반신불수 상태의 효도르3세(Feodor Ⅲ, 1676-1682)가 총주교의 선동에 힘입어 서자출신인 뾰뜨르1세(Peter Ⅰ, 1682-1725)와 공동 짜리로 승계 했다.
그러나 승계당시 뾰뜨르의 나이도 10세밖에 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효도르3세 손위의 누이인 쏘피아(Sophia)가 친위병들의 도움을 받아 섭정정치를 했다.이때 알례쏀이 1세의 첫째부인이며 효도르3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밀로슬랍스끼(Maria Miloslavsky)와 둘째부인이며 뾰뜨르의 어머니인 나딸리아 나루쉬낀(Natalia Naryshkin)가족간에 벌어진 권력투쟁은 지도력 분열의 대표적 관행이었다. 뾰뜨르가 단독짜르에 오른 것은 권력투쟁 양상인 궁중 쿠테타의 결과였다.이 같은 정치문화의 이해와 상황 속에서 뾰뜨르는 힘으로 전제권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적 정치문화속성 중 또 다른 산물은 사회주의이다. 사회주의가 러시아적 전유물로 부각되기 시작한 시기는 19세기초부터이다. 당시 러시아 지성들이 러시아의 진로를 놓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 과정에서 "슬라브주의자들"(Slavophils)과 "서구주의자들"(Westernizers)공히 러시아에 대한 애정과 러시아농민의 이상화 및 농촌공동체(mir)를 옹호한 사실이다. 특히 농촌공동체를 제도적 측면에서 러시아사회의 건전한 기반으로 보고, 이를 사회건설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러시아 지성들의 농촌 및 미르의 예찬은 바로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것으로써 농촌에서 미르가 보여준 토지의 공동소유, 공동관리, 공동배분, 공동납세방식이며, 더욱이 자율적으로 무리 없이 협동적으로 관리되어온 점을 높이 사고있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러시아의 사회주의 발전요인은 정부의 인민에 대한 탄압과 수탈 및 대다수 농민의 농노화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으로써 양식있는 지성들의 자각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적 노선의 행태적 이행은 1870년대에 행해진 "인민으로의 운동"(v narod)으로 표출됐으며, 이는 정부의 탄압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진 인쩨리곈찌야운동의 핵심사상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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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01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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