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으로 본 구약 속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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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고학으로 본 구약 속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성서 고고학의 태동

1장. 읽어버린 에덴
잃어버린 에덴
가인과 문명의 시작
노아 홍수
바벨탑과 언어의 분화
아브라함의 이주
소돔과 고모라
족장 시대의 사회생활
요셉과 애굽 이주
애굽 체류

2장. 약속의 땅
출애굽 사건
출애굽의 여정
시내산 언약과 모세 율법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가나안 정복
가나안 문화와 종교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과 블레셋

3장. 이스라엘 왕국
혼돈의 사사 시대
다윗의 응전과 제국 건설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
이스라엘의 황금 시대
분열 왕국 초기 시대
오므리 왕조 시대
에후 왕조 시대의 남북 왕국

4장. 또다른 시작
밀려오는 북방의 물결
히스기야와 산헤립
요시야의 개혁과 앗수르의 멸망
남 왕국 유다의 멸망
바벨론의 영광과 느부갓네살
포로 귀환과 성전재건
구약 역사의 종결

본문내용

산헤립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주전 701년 서방 원정을 단행하여 팔레스타인의 여러 도시 국가들을 점령하였고, 예루살렘의 주변이 있는 성읍을 파괴하였다.
히스기야가 예루살렘의 공격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산헤립의 궁전에 그려진 라기스 점령 벽화에서도 확인된다. 만일 그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면 주변 도시에 불과한 라기스가 아닌 예루살렘성을 벽화에 그렸을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히스기야의 지하 수로이다(왕하 20:20)
어쨌든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샘물을 다윗 성 안으로 끌어드렸고, 그 결과 모든 일이 형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대하 32:30).
요시야의 개 혁과 앗수르의 멸망
히스기야 왕의 필사적인 항거가 앗수르의 유대에 대한 지배를 잠시 보류시켰지만, 므낫세가 왕위에 오르자 앗수르의 세력은 노도와 같이 밀려 들었다. 므낫세가 성경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되었던 것은 그가 우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이다. 므낫세는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앗수르의 일월성신 예배를 받아들이고 청동 제단을 건립함으로써 그의 속국이 되었다.
므낫세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아몬은 2년 만에 암살당하고, 그 아들 요시야(B.C. 640∼609)가 불과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요시야는 주위에 훌륭한 조언을 듣고 통치 8년에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기 시작하였다.(대하 34:3) 이 때가 바로 포악한 앗수르바나팔이 죽은 무렵이었다. 그리고 연이어 앗수르의 혼란한 틈을 타서 통지 12년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던 산당과 아세라 목상, 우상들을 제하여 버렸다.
그의 종교 개혁이 유다에 국한되지 않고 므낫세와 에브라임, 시므온, 납달리 지역까지 확장되었던 것도 종교적으로 옛 북왕국 지역을 회복하여 이전의 다윗 제국과 같은 통일 왕국을 건설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앗수르를 허약한 완충국으로 남겨둠으로써 신흥강대국 바벨론의 세력을 완화시키고 팔레스타인을 수중에 장악하려고 한 느고의 계획은 요시야의 저항으로 좌절되었다. 비록 요시야는 이 전쟁에서 전사하고 말았지만 애굽 원정군이 하란에 이르기 전에 바벨론이 앗수르를 이미 멸망시켰던 것이다. 흔히 요시야의 죽음을 의인의 죽음이라고 한다. 그의 죽음은 크게 우상의 대제국 앗수르를 심판한 것이었으며, 작게는 살육의 골짜기에 세워진 도시 므깃도를 심한한 것이었다. 요시야의 죽음 이후 므깃도는 소도시로 전락했으며 주전 4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 버렸다.
남 왕국 유 다의 멸망
주전 605년 갈그미스 전쟁에서 애굽을 무찌른 바벨론 군대는 팔레스타인으로 남진을 계속했다.
이때 유다의 왕은 여호야김이었으며, 애굽의 느고가 세운 왕이었다. 바벨론 군대가 팔레스타인의 어디까지 남하했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전통적으로는 다니엘 같은 유다의 귀족 자제들이 인질로 사로잡혀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예루살렘에서도 이러한 위기감이 팽배하였다. 금식이 선포되었고 선지자 예레미야의 재앙을 선포하는 메시지가 전해졌다.(렘 36장) 그러나 왕과 신하들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불태워 버렸고 조금도 회개하는 빛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바벨론에 항복하였는데 아마도 예레미야가 재차 경고하는 말에 여호야김의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고, 아스글론의 멸망을 본 후 항복을 결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유다는 신흥제국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
주전 586년 예루살렘 성안의 식량은 바닥이 났고, 바벨론 군대들이 성벽을 뚫고 쏟아져 들어왔다. 시드기야 왕은 도망치다가 붙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 버렸다. 이렇게 유다는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바벨론의 영광과 느부갓네살
바벨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 괴팍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벨론의 주신인 마르둑보다 달의 신인 난나(또는 신)를 더 경배하며, 국정을 아들 벨사살에게 맡기고 멀리 떨어진 아라비아의 데마에서 살았다. 섭정 왕이 된 벨사살은 다니엘서에 기록된 것처럼 주연을 베풀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그릇으로 술을 따라 마시는 죄를 범하였다. 그때 벽면에 손가락이 나타나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을 썼다. 그 뜻은 왕의 나라가 끝이 났고, 저울에 달아보니 무게가 모자라서, 메데와 바사에게 나라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다니엘이 세 번째 치리자가 되었지만, 물밀 듯이 밀려온 메데와 바사의 연합군에게 바벨론은 망하였고 베사살은 죽임을 당하였다.
포로 귀환 과 성전재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는 유다의 여러 성읍들을 철저히 파멸시켰다. 고고학적 증거가 보여주듯이 예루살렘과 라기스, 벧세메스, 텔 베이트 미르심 등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인구가 극히 희박해졌다. 그러나 점차 시국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주변 국가에 흩어졌던 난민들이 돌아와 살기 시작했고, 무너진 성전에 모여 희생 제물을 드리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의 기간이 다 채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역사는 새로운 장을 열고 있었다. 최고의 절대 군주권을 자랑하던 바벨론 제국은 기울어져 갔고, 고레스가 건설한 바사 제국이 흥기하고 있었다.
주전 522년 바사 젝국의 혼란과 더불어 다리우스 1세가 등극하자, 학개와 스가랴가 성전 재전을 독려하였다. 그리하여 성전 재건은 다시 시작 되었고, 다리우스 1세가 엑바타나(Ecbatana) 왕실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된 고레스의 칙령을 확인한 후에 성전 재건을 위한 경비 지급을 명령하게 되었다.
구약 역사 의 종결
바사(페르시아) 제국에는 여러 도읍지들이 있었는데, 수사(성경의 수산)은 다리우스 1세 (B.C.522∼486)가 세운 화려한 궁전이었다.
다음에 등극한 아닥 사스다 1세(B.C. 465∼424)시대는 에스라와 느혜미야가 활약한 때이다.
느혜미야는 에스라와 함께 귀한 백성들을 순수한 야훼 신앙으로 굳게 결속시켰다. 특히 에스라는 오경을 중심으로 신앙의 실천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제 2의 모세로 추앙받기도 한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죽었지만, 바벨론에서 죽어 남부 이라크의 우자이르(Uzair)에 묻혔다는 전승도 있는데, 이 무덤은 오늘날까지도 성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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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21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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