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문화의교류_최종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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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서문화의교류_최종수정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동서간문화의통로

2. 漢, 동서 교통로를 개척하다

3. 唐, 실크로드의 전성기를 달리다

4. 元, 세계의 문물이 한자리에

5. 明淸, 고립을 자초하다

본문내용

등의 여러 종파가 성행하였다. 이중에서 티벳의 불교인 라마교가 원 황실의 신임을 크게 받았다. 라마교는 6~7세기 경에 티벳의 토속종교와 대승불교가 혼합되어 성립된 불교인데 몽고 황실과 귀족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고 세조의 숭배를 받아 국교의 지위를 누렸다.
이 시기에는 동방 문화의 전파 역시 활발하였다. 지금도 이란에서 원대의 도자기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당시 많은 도자기가 이슬람 세계로 수출 되었다. 또한 송·원대에 나침반이 서아시아로 전래되어 후일 유럽의 항해술에 큰 기여를 했다. 화약도 이때에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으며, 인쇄술도 일 한국에 전해져 일 한국에서 교초발행의 기반이 되었다.
위와 같이 원 대의 동서교류는 그 어느때보다 활발히 이루어졌다. 한 대의 개척과 조공 형식의 교류와 당대의 개방적 수용을 통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형성을 뛰어넘는 세계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민족의 정복왕조로 한족의 문화를 토대로 한 비판적 수용이 아니라 색목인을 관리로 등용하여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들이 차지한 광대한 지역은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였고 토착민을 다스리기 위해서도 문화수용은 필요했다. 즉, 몽고의 깃발 아래 문화의 상호 교류와 발달이 용이했던 것이다.
5. 明淸, 고립을 자초하다
명의 건국은 이민족의 왕조를 타도하고 한민족의 주권회복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문화정책은 몽골풍습을 금지하고 한문화의 부흥을 위한 唐宋의 제도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었다. 서방과의 무역도 활발하지 못했다. 비단길과 초원길은 북방에서 몽골부족에 의해 두절되었고 정화의 남해 원정으로 개척된 해로도 명 중기 이후부터는 활발하지 못했다. 여기에 국가에서 대외무역을 제한하고 바다로 나아가는 것을 금지하는 海禁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동서교류가 역사상 가장 빈약한 시대가 되었다. 한편, 서양은 르네상스 이후 지리와 천문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신항로 개척에 나섰다. 이에 인도항로가 개척되고 명 말에는 중간에 이슬람 상인을 거치지 않고 유럽 세력이 직접 아시아로 진출하였다. 가장 처음 진출한 포르투갈은 중국의 광주에 이르러 통상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고 마카오에서 국제무역에 종사하였다. 이때 중국의 견직물차 등을 가져갔고 대신에 대량의 은이 중국에 유입되어 은본위 화폐 경제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선교사로 활약한 사람은 마테오 리치와 아담 샬이었다. 그들은 중국에 수학천문학지리학 등을 교수하였는데, 위정자들은 왕조 체제 유지에 급급하여 그 관심은 호기심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결국 개방적으로 문물을 수용하던 원대와는 달리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술과 항해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금무역을 실시한 것은 후에 있을 서세동점의 전주곡이었다.
명에 이어 이민족이 세운 청은 광동무역 체제로 전환한다. 이는 전면적인 해금무역을 해제하고 외국배의 내항 통상을 허가하는 제한무역이다. 그러나 역시 중화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였고 조공무역을 유지하였다. 한편, 서양의 산업혁명 이후 출현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동양을 기존의 중계무역 대상에서 자국의 원료공급지이자 상품시장으로 전환시키려 하였다. 결국 서양의 통상요구와 청의 제한무역 체제는 충돌이 불가피했고, 아편을 매개로 한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내려오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청의 패배는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세계의 충격으로써, 이후 제국주의 열강이 동아시아를 침략해 들어오는 발판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원대 찬란하게 꽃피웠던 동서 문화교류는 명대 재개된 중화주의로 퇴보하게 되었고, 청대에 이르러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무력 침탈로 인하여 원료 공급 및 상품 시장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우수한 항해술과 조선술이 있었음에도 자국 중심의 소극적인 무역의 전개는 체제유지에 급급한 위정자들의 태도에서 멸망을 자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중국은 문호를 활짝 열고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있으며 베이징 올림픽도 성공리에 마쳤다. 그들은 아마도 과거 東西 文化 交流史를 통해 소통과 단절의 의미를 잘 배웠으리라 생각된다.
<참고문헌>
『동양사개론』. 신채식. 삼영사. 2007
『동양사서설』. 이춘식. 교보문고. 1991
「중국고대의 동서문화 교류에 대하여」.최재용.경주 사학회.1992
『고대문명교류사』. 정수일. 사계절. 2001
『반주류 실크로드사』. 김영종. 사계절. 2004
『중국문화』. 김용범. 보성. 2004
『중국사』. 신승하. 대한교과서주식회사. 2005
  • 가격2,8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3.10.10
  • 저작시기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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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85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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