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관련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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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복궁 관련 조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창건배경

2. 변천사
(1) 경복궁의 창건과 발전

3. 건물별 둘러보기
1. 광화문 2. 흥례문 3. 영제교 4. 근정문 5. 유화문 6. 근정전 7. 사정전 8. 수정전 9. 경회루 10.강녕전 11. 교태전 12. 흠경각13. 함원전 14. 자경전 15.풍기대 16. 집경당 17. 향원정 18, 건청궁터 19. 시해터
20. 기단석 21. 재수합 22. 비현각 23. 자선당 24. 건춘문 25. 영추문 26. 신무문 27. 집옥재 28, 동십자각

4. 복구논의

5.재건

6. 중건이후

본문내용

있기 때문이다.
4. 복구논의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터전만 남긴 채 소실되자 1606년 11월에 경복궁 복구가 논의되었으나 실천되지 못하였고, 1616년 말과 1617년에도 중건이 논의되기는 하였으나 역시 중지되었다. 현종(顯宗)도 재건을 염원하긴 하였으나 공역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으며, 단지 1669년(현종 10)에 신덕왕후(神德王后) 부묘 때 그 제주소(題主所)를 강녕전 터에 장전(帳殿)을 설치하여 봉안한 바 있을 뿐이다.
숙종도 황폐한 경복궁에 가서 살피면서 감회에 젖었으며, 영조도 또한 그 복구를 생각하고 1772년(영조 48)에는 문소전 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으나, 끝내 경복궁의 중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5.재건
경복궁의 중건은 1865년(고종 2) 4월 2일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대원군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졌다.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도제조에 조두순(趙斗淳)·김병학(金炳學)을 임명하고 제조로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김병기(金炳冀)·김병국(金炳國)·이돈영(李敦榮)·박규수(朴珪壽)·이재원(李載元)·임태영(任泰瑛)·이경하(李景夏)·허계(許棨)·이현직(李顯稷)·이주철(李周喆)이 차하(差下)되었다.
4월 4일에 개기(開基)를 위한 영건고유제(營建告由祭)를 거행하고 4월 8일에 대왕대비는 10만 냥을 중건역비로 하사하였으며, 4월 12일에 경복궁을 중건할 터전의 친심(親審)이 있었다. 이에 앞서 4월 8일에 궁성을 쌓고 5월 2일에는 광화문을 비롯한 궁성문의 상량 날짜를 정하였다.
담장과 문의 석축부분은 임진왜란 때 재화를 면하고 남아 있어서 이것들을 헐고 다시 지어야 하였다. 중건공사에 소용되는 경비를 원납전(願納錢)이라 하여 거두었는데, 4월 말까지 1차로 수납된 것은 일반인이 바친 75만 7086냥 4전 9푼과 왕족들이 기부한 7만 6450냥이었다.
이후 이 기부금의 징수는 계속되었으며, 6월 20일에 강녕전·연생전의 정초(定礎), 10월 9일에 입주(入柱), 10월 10일에 상량하였다. 10월 24일에는 함원전(含元殿)·인지당(麟趾堂)이 입주되고, 11월 16일에는 상량이 있었으며 12월 24일에는 천추전(千秋殿)의 정초가 있었다.
이듬해 3월 6일에는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5일 밤 이경(二更)에 동십자각 근처 훈국화사(訓局畵師)의 가가(假家)에서 불이 나서 목수간 800여 칸과 다듬은 재목들이 타버리고 말았다. 1867년 2월 10일에
불이 나서 재목을 불태웠다. 그래도 공사는 진척되어 3월 27일에 경회루의 상량이 준비되고 5월 2일에는 수정전(修政殿) 상량문의 제술관(製述官)을 선정하였다.
8월 18일에는 전각과 문의 이름들을 지었고, 11월 8일에는 완성된 건물의 당호(堂號)를 지었다. 11월 14일에 백관들이 경복궁 출입시 승지(承旨)는 영추문을, 문관은 정문인 광화문의 홍예문 중 동쪽문을 이용하게 하고 무관은 서쪽으로 드나들도록 제도화하였다.
1868년(고종 5) 6월 10일 경복궁 재건공사가 사실상 끝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임금의 이어(移御)에 대비하여 병조에서 입직(入直)을 준비하였고, 7월 2일에 드디어 임금은 대왕대비를 모시고 새 궁궐에 이사하니 비로소 경복궁은 정궐(正闕)로서의 위엄을 다시 갖추게 되었다.
1869년 9월 16일에 경복궁 재건을 위하여 설치되었던 영건도감이 철폐되었는데, 이 때에 집계한 원납전 등의 내용은 내하전(內下錢) 11만 냥, 단목(丹木) 5,000근, 백반 5,000근, 왕족이 바친 돈이 34만 913냥 6전, 일반인들의 원납전 727만 7780냥 4전 3푼과 백미 824석이었다. 준공된 전각은 합계 5,792칸 반이었다.
6. 중건이후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1872년 4월 7일 신무문(神武門)을 개건하고 1873년 봄부터 건청궁(乾淸宮)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창덕궁의 주합루(宙合樓)와 서향각(書香閣)을 본떠 어진(御眞)을 봉안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해 12월 10일 사시에 순희당(純熙堂)에서 불이 나서 인지당·자경전·복안당·자미당·교태전·복도·행각 등 합계 364칸 반이 연소되는 대화가 있었다. 이듬해 정월부터 복구공사가 착공되었으나 공비의 부족으로 지지부진, 1875년 3월이 되어서야 공사가 본격화하여 1876년 4월에 대체적인 복구공사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4일에 또 불이 나서 먼저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으니, 침전 일각 830여 칸이 소진되고 말았다. 이 재해의 복구는 상당히 늦어져서 1888년 2월 25일에야 교태전·강녕전·인지당·자미당의 상량문의 제술(製述)이 있었다. 1890년 6월에 경성전(慶成殿)의 화재가 있었으나 곧 진화되었다.
1896년(건양 1) 2월 16일 경복궁의 수리공사에 착공하고 97년 5월 20일에는 경복궁의 만화당(萬和堂)을 경운궁(慶運宮)에 이건하였다. 1899년 9월 21일에 영보당(永保堂)에 불이 나 28칸이 소진되었다. 그후 고종이 주로 경운궁에 시어하게 되면서 경복궁은 소강상태로 들어가는데, 이것으로 경복궁의 공역은 일단 마무리되고 또 나라가 멸망함으로써 궁궐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1917년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을 비롯한 대내 일곽이 불에 탔다. 이것의 복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일곽을 헐어다 재건에 썼다. 이때에 철거된 전각은 교태전·강녕전·연길당·경성전·연성전·인지당·흠경각·함원전·만경전·홍복전 등 400여 칸에 달하였다.
그후 일인들은 광화문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들을 철거하거나 이건하였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비롯하여 공진회 건물 등 낯선 건축물을 지었다. 또 각 지역의 석탑 등의 석조물을 반입하여 요소에 배열하여 일반에게 공개하도록 하였다.
8·15광복 이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안의 북동쪽에 건축되었으며, 6·25전쟁 때 문루가 불탔던 광화문육축의 석대를 궁 남쪽에 옮겨 시멘트로 문루를 세웠다.
1996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2009년까지 총 1,789억 원이 투입되어 경복궁 복원사업이 이루어진다. 1995년에는 강녕전이, 1999년에는 자선당 등이 복원되었으며, 2001년 10월에는 흥례문(홍례문)이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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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21
  • 저작시기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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