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전쟁사(페르시아전쟁,마라톤전투,살라미스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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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페르시아전쟁 개관 (Greco-Persian Wars BC 546경-448경)
〔페르시아 전쟁과 아테네 제국〕
<그림-1> -페르시아전쟁 지역

⊙ 페르시아 전쟁(Persian War)
〔이오니아(Ionia) 반란(反亂)〕
〔제1차 페르시아 전쟁(Persian War I)〕
〔제2차 페르시아전쟁(Persian War II)〕
- 마라톤 전투, The Battle Of Marathon (490 BC)
<그림-2> -마라톤의소년(마라톤출토)
- 아테네의 라우리온 은광 발견(483BC)
- 테르모필라이 전투, The Battle of Thermopylae(480BC)
- 살라미스 해전, The Battle of Salamis (480 BC)
- 플라타이아 전투, The Battle of Plataea (479 BC)

본문내용

결과 아테네인들은 상업 및 군사적 목적으로 200척의 함선 건조에 투자하기로 결정하였다. 아테네가 그리스 도시국가 중 처음으로 은전을 주조할 수 있던 이유도 은광의 발굴 때문이다. 은광에서 발생한 새로운 재원은 5세기 아테네가 최강의 도시국가로 성장할 수 있게한 밑바탕이 되었다.
5세기 이전에 해전에 사용된 선박의 형태는 50노선(penteconter)이었다. 아테는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주력 함선을 훨씬 성능이 우수한 삼단노선(triere)으로 교체함으로써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좌측은 50노선이고 우측은 3단노선이다. 그리고 하단 중앙의 사진은 현재 그리스에서 유통되고 있는 50드라크마 동전의 앞면이다.
- 테르모필라이 전투, The Battle of Thermopylae(480BC)
현재의 테르모필라이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북부 그리스에서 중/남부 그리스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지리적 모양이 약간 했지만(해안이 더 가까이 있었다) 현재의 국도는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 원정군이 행진했던 경로와 비슷하다.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군 5백만에 그리스군 수 천 만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페르시아군 30만 명에 그리스군 7-8천 명인 것으로 추정된다
테르모필라이 관문에서 진을 친 그리스 연합군에 대한 공격은 쉽지 않았다. 페르시아의 첫번째 공격이 대패로 끝나자 크세르크세스는 후퇴하는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하면서까지 전투에 임했다.
며칠 동안 저지선을 뚫치 못하던 페르시아는 그리스인 에피알레스가 알려준 우회로를 통해 테르모필라이로 진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는 테베 병력만 제외하고 모두 철수시켰다.
스파르타의 300인대는 최후까지 관문을 사수하기 위해 싸웠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그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던지 이를 지켜보던 크세르크세스는 쓰러지는 병사들을 보고 세번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테베군은 크세르크세스에게 항복하였다.
좌측(사진) 기념물은 테르모필라이 관문에서 싸우다 전사한 병사들을 기린 것이다. 1955년 세워진 이 기념물은 미국이 세운 것이다. 이 청동상은 레오니다스를 묘사한 것이다. 이 것은 스파르타 박물관에 소장된 5세기 경 대리석상을 모델로 하였다. 청동상 기단은 테르모필라이 전투 장면이 부조화 되어 있다. 우측 하단의 청동 명판에는 전사한 스파르타 병사들을 위한 유명한 경구가 세겨져 있다.
- 살라미스 해전, The Battle of Salamis (480 BC)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의 "해군의 중요성에 대한 신조" 덕분에 페르시아 군이 아테네에 침입하여 도시를 깡글이 불태웠음에도 아테네인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 크레르크세스(Xerxes)의 침입이 있기 전에 델피의 신탁은 '아테네의 모든 것이 불에 탈 것이며 오직 목재 담장(wooden wall) 에 있는 것만 온전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이 신탁의 의미가 사람들을 아크로콜리스로 대피시키고 페르시아 군이 물러날 때까지 버티라는 뜻이라고 해석하였다(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오래전 아크로폴리스는 가시나무 담장으로 둘려쌓여 있었다고 한다. 연장자들이 아크로폴리스를 주목한 것은 그런 전설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목재 담장' 이라는 신탁이 의미하는 바는 아테네 해선으로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벽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아테네인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말에 따라 여성과 어린이는 근처의 트로이젠(Troezen)으로 대피시켰으며, 노약자는 살라미스 근해의 섬으로 소개시켰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의 말을 따르지 않고 아크로폴리스에 남아있던 소수의 사람들은 페르시아 군이 온 도시를 불태워 목숨을 잃고 말았다.
헤로도토스(8:70-94)와 아이스킬로스(Aeschylus)의 극 <<페르시아인들(The Persians)>>에 보면 이 해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이 해전에 관한 기록이 꽤 과장되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사실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가 심어놓은 위장 첩자의 거짓 정보를 믿은 페르시아군은 그들의 함대를 살라미스 만 어귀에 정박시켰다. 이렇게 한 이유는 아테네군이 아침에 함대를 배치하기 전에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새벽에 페르시아 해선이 살라미스 만 안으로 들어올 때 그들은 그리스의 함정 빠져버리고 말았다. 만 뒷쪽의 해협에 숨어있던 그리스 해선들이 일시에 충각전법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간격이 좁은 살라미스 만에 꽉 들어찬 페르시아 선박은 급작스런 아테네 해선의 공격에 제대로 대항할 수가 없었다. 해전에 패한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 군은 급히 퇴각하였다.
그리스군은 약 40척의 배밖에 잃지 않은 반면 300여 척의 페르시아 배를 침몰시켰다. 간신히 빠져나간 페르시아 전함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크세르크세스는 계획했던 상륙작전을 1년 동안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그에게 대항해 단결할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대규모 해전이었다.
하지만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페르시아의 위협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 플라타이아 전투, The Battle of Plataea (479 BC)
아테네 북부, 아팃카와 보이오티아의 경계선에 위치한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31개 도시국가들의 그리스 연합이 페르시아와 테베을 물리쳤다. 테베는 원래 그리스에 속하나 페르시아 편에 선 도시국가이다. 페르시아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장군 마르도니우스(Mardonius)를 살해하였다. 마르도니우스이 검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전리품으로 진열되었다. 아테네는 테베의 신성부대(Sacred Band) 대부분을 섬멸하였다.
그러나 15년 후 테베는 아테네와 플라타이아의 연합군에게 보복을 하게 된다. 기원전 431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테베가 점령했던 최초의 도시가 된 것이다. 이 전투 이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더 이상 "외부의 침입자"에 대한 공통의 그리스 연합군을 형성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적에 대해서만 연합군을 형성하였다.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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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1.28
  • 저작시기2003.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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