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신분제도 연구 - 공노비의 존재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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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고려시대 신분제도 개관
1) 고려의 신분구조
2) 양천제와 사서제

2. 고려시대 노비의 존재양태
1) 노비의 종류
(1) 사노비
(2) 공노비
2) 노비의 사회경제적 지위
(1) 공역노비의 사회경제적 지위
(2) 외거노비의 사회경제적 지위
3) 노비의 신분제적 지위
4) 노비의 생활상

3. 맺음말

본문내용

屬民의 比較史 』354쪽, 일조각
원종 3년(1262) 王政復古의 공신들에게 노비 10구씩이 賜給된 내용이 기록된 고문서 『尙書都官貼』
허흥식, 1988, 『한국의 고문서』275∼279쪽, 민음사. (李榮薰, 「韓國史에 있어서 奴婢制의 推移와 性格」, 歷史學會, 2002, 『노비·농노·노예 隸屬民의 比較史 』354쪽, 일조각)에서 再引用
에 따르면 왕실에 소속된 노비 10인의 부모를 알 수 있으나 그중 2인은 아버지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母婢의 性이 掠取되었거나 同居律이 적용되지 않은 혼인으로서 가족형성이 보장되지 않거나 불완전한 형태임을 집작케 한다. 여기서 보듯이 공노비라 해도 供役에 종사하는 왕실이나 관청의 使令奴婢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혼인과 가족형성에서 매우 不安定한 處地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나머지 8인의 노비의 부모, 곧 8쌍의 夫婦는 同居律을 포함한 혼인의 여러 요소를 갖춤으로써 그 가족 형성이 어느 정도 안정된 경우로 보인다. 이는 11세기 초에 일상화한 노비의 혼인과 가족형성의 상황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위와 같음.
노비들의 주된 거주지를 살피면 대체로 노비들은 개경이나 畿內에 集中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승기가 찾아낸 農耕奴婢는 모두 開京 近處이거나 좀 멀어도 畿內에 사는 자들의 노비이다.
홍승기, 1997, 『고려귀족사회와 노비』415쪽, 일조각
여러 기록을 종합하면 고려시대의 노비는 門閥官僚, 中央軍의 집결지인 개경과 그 隣近에 주로 分布한 것으로 類推할 수 있다. 노비와 자식을 賣買한 者에 대한 禁令을 보면 위반자에 대한 처벌이 歸鄕刑이었음으로부터 그들이 주로 개경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노비에 한하여 살피면 무신집권기의 奴婢叛亂 기록을 근거로 실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노비반란은 모두 10차례 일어났는데 그 중 5회는 개경에서 일어났고, 5회는 지방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지방에서의 반란은 거의 官奴들에 의해 主動되었다.
홍승기, 앞의 책 8장 參照
이로써 고려 노비의 중심은 개경이었으며 지방의 경우 官奴婢, 즉 공노비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地方奴婢로서 私奴婢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맺음말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이 고려의 노비는 이전 시대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발전하였다. 그 기본방향은 사노비와 농경노비의 확장에 있다. 노비가격은 법정되었고, 신분의 세습이 제도화되었으며, 영구히 해방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나아갔다. 노비는 공동체에서 내적으로 추방된 존재였으며 따라서 왕조에서는 노비와 양인의 交婚을 억제하는 반면 채무노예의 발생도 억제하려 노력하였다. 노비의 가격이 법정되었던 것으로 보아 매매가 불법은 아니지만 사적인 처분을 관의 통제와 관리 아래 두고 이를 가능한 한 억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사노비의 증가가 두드러졌다고 하지만 고려 노비제는 國家奴隸的 특질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노비의 경제사적 성격은 그들의 노동, 가족, 상속 등의 양상으로 미루어 노예로 간주되는데, 그렇다고 고려가 奴隸制 사회는 아니다. 노비의 인구도 비교적 적었고, 그나마 주로 개경 인근에 집중되었으며, 奴보다 婢의 가격이 더 높았던 것으로 보아 농경노비보다는 家事雜務에 종사하는 使令奴婢가 더 중시된 점 등으로 미루어 이들의 高麗農業生産構造에서 차지하는 比重은 매우 낮은 것이기 때문이다. 무신집권기 이후 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말기에 이르러 고려의 노비제도는 큰 변화를 겪게되는데, 이는 수적으로도 크게 증가하고 생산구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는데, 노비제도 자체로는 발전하는 것이지만 한국사의 역동적 변화발전에는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서구는 물론이고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도 중세가 끝날 무렵이면 노비 등 예속민의 존재가 사라져 가는데 비해 한국사에서 노비의 존재는 조선시대 말기까지 끈질기게 명맥을 유지한다. 이 점은 향교 등 동시대 동서양의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공교육시설과 제도를 보유하는 등 선진문화를 가진 조선사회가 이러한 노비제도를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만큼 온존시킨 배경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元 干涉期에 노비제의 폐지를 권하는 원 조정에 대해 고려의 지배층이 총력을 경주하여 이를 철회시킴으로서 한국사가 외세의 간섭을 이용하여 자기 사회의 비약적 발전을 꾀할 역사적 기회를 상실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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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05
  • 저작시기200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36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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