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영웅인가 간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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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대적 배경

2. 조조

3.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시대

4. 인물 분석

5. 간웅이라 불리우는 조조?

6. 조조가 악역이 된 이유

7. 조조에 대한 평가

8. 조조의 죽음

9. 조조의 미스테리

본문내용

지연의 곳곳에서 발견할수 있다. 그러한 대다수는 조조를 악인으로 묘사하는데 이용되고 있으며 유비는 똑같은 수법이나 정반대의 묘사를 위해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조조는 오랫동안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지만 근간에 중국학계에서는 조조복권운동이라 할만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7. 조조에 대한 평가
조조는 중국 후한 말 하루를 점치기 어려울 정도의 대 혼란기를 맞아, 감히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치적을 남긴 인물이다. 군웅들이 한꺼번에 떨쳐 일어나 하나같이 천하를 차지하겠다고 으르렁댔으며, 그 가운데 죄 없는 백성들은 파리 목숨보다 더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가야만 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조조는 백성들의 삶을 위하여 둔전제를 실시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 성공을 바탕으로 군웅들을 차례차례 꺾고 중원을 통일했다. 어디까지나 조조의 중원통일 과정은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하여 치밀한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고, 뛰어난 지도력과 용병술을 발휘한 덕분이다. 이러한 조조의 능동적인 활약은 당시는 물론 후대에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여 진대(晉代)의 육기는 그의 「조위무제문」에서 '그 큰 덕은 온 세계를 뒤덮고 해와 달처럼 빛나네'라고 추앙하였으며, 정관의 치를 열었던 당태종도 몸소 조조의 묘당에 제사를 지내며 「제위태조문」을 지어, 백성들을 도탄에서 건지고 무너져가는 한나라의 사직을 구한 그의 광정의 공을 기렸으며, 당현종은 조조를 좋아한 나머지 자신의 별명을 조조의 아명을 빌려 '아만'이라고까지 하였다. 또 북송의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조조는 긍정적으로 비쳐지고 있었으며, 조조의 아들 조비가 이룩한 조위는 정통왕조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정은 남송으로 넘어오면서 급전직하 뒤바뀌었다. 이것은 중원을 여진족의 금나라에 빼앗기고 강남지방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남송의 지리적 위치와, 여기에서 오는 한족의 민족주의적 애국심의 발동으로 조위가 타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문치주의를 표방했던 송나라에서는 유학의 이념화와 아울러 성리학과 명분론이 시대를 이끌었고, 급기야 남송에 이르러 서는 정주학 또는 주자학으로 발전하면서 조조의 일거수일투족은 부정적인 꼬투리로 작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자가 버티고 서 있었으며, 그의 눈에 비친 조조는 충군의 정성이 모자라고 백성들을 혹독한 법으로 혹독한 법으로 다스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주자의 조조 배척은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조조는 누구보다도 공자를 좋아했고, 주공(周公)과 우(禹)임금의 치적을 추앙했다. 그리고 이들이 못 다한 한이라도 풀려는 듯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그런데 공자가 누구인가? 바로 유학의 종사가 아닌가. 또한 주공은 공자가 오매불망했던 정신적 스승으로 충군의 표산이다. 이러한 성인들을 감히 조조 따위가 들먹이다니! 그래서 주자는 조조가 시문을 통하여 공자나 주공을 거론할 때마다 매섭게 몰아부쳤던 것이다. 조조를 욕하는 빌미가 되었던 헌제에 대한 처우와 강력한 법치의 표방은 당시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면 어찌할 수 없었던 조치였다. 사실 중국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숱한 영웅들, 진시황이나 한고조 유방, 한무제나 당태종 같은 이들도 조조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으면 죽였고, 더 비인간적인 처사를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유독 남송의 애국적인 사조에 편승한 조조 비판은 더욱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진이나 남조에서 은연중 유비를 정통으로 여기고 싶었던 생각은 남송에서 급기야 「촉한정통론」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노신(魯迅)은 조조를 "재능이 뛰어난 영웅"으로 평가하였으며, 모택동(毛澤東)도 그를 위대한 인물로 칭송했다. 1959년 곽말약(郭沫若)이 조조의 명예회복을 선언하고 나온 이후 그에 대한 찬반 양론이 끊이지 않았지만, 현재까지도 여전히 그를 간신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최근에 어떤 사람은 곽말약의 뒤를 이어 조조의 명예회복을 위해 나섰지만, 단지 그를 "난세의 효웅(梟雄)"이라 일컬었을 뿐이다. 효웅과 영웅은 그 의미가 다르다. 효웅은 강직하면서도 야심이 있는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영웅에 비해 다소 격이 떨어지는 말이다.
조조가 다소 잔인하고 교활하다는 것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가 중국역사상 이룩한 공적에 대해서도 묵과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조조라는 역사속의 인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해봄으로써 그의 진면목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8. 조조의 죽음
건안 24년(219) 한중(漢中)에 이르러 조조는 병력을 형주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손권과 유비의 연맹을 갈라놓고 그들을 격멸하려는 작전에 착수하였다. 손권을 교사하여 촉한(蜀漢)의 명장 관우를 죽이도록 한 다음 불리했던 형주전선에서 신속히 우위를 되찾았다. 건안 25년(220) 정월, 조조군의 위세가 한창 드높아갈 때 조조는 낙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20년 정월 조조는 병세가 심각해지자 비밀리에 측근들을 불러놓고, 그가 죽은 후 무덤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안장할 때 72개의 가짜 무덤을 만들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후궁들에게는 진귀한 향을 나누어준 다음 부지런히 신발 만드는 기술을 익혀서 자급자족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경자일(庚子日)에 낙양에서 병사하였다. 적벽대전 이후에 형성된 위(魏) 촉(蜀) 오(吳) 삼국정립의 국면은 50여년간 지속되었다.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위나라의 황제가 된 후에 조조를 무제(武帝)로 추존하였다
9. 조조의 미스테리
조조는 죽기전에 자기 무덤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72개의 가묘를 만들라는 유언을 하였다. 죽어서 무덤이 파헤쳐질 것을 두려워한 것을 보면 조조는 생전에 다른 사람들의 원한을 살 일을 많이 저질렀던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죽은 후의 안위까지 고려하여 72개의 가묘를 만들어 철저히 위장한 것을 보면 역시 조조다운 발상이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그러면 조조의 진짜 무덤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것은 아직까지도 미스테리에 싸여 있다. 조조의 진짜 무덤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 학자들의 이설이 분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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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12.13
  • 저작시기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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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38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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