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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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그리고 경원.종성광산채굴권,이천 월미도저탄소설치권, 압록강유역과 울릉도삼림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탈취당하였다. 이밖에도 러사아는 알렉시예프를 탁지부고문으로 삼아 조선의 재정을 요리하였고,정식조인은 되지 않았으나 러시아 황제 대관식 때 비밀리에 열린 로바노프.민영환(閔泳煥)회담에서는 러시아가 5개조의 원조를 약속한 대신 조선에게는 17개조의 이권을 요구하였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열강도 경제적 이권쟁탈에 열중하였다. 열강은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지만 경제적 이권에는 기회균등을 요구하여 전차.철도부설권,삼림채벌권,금광.광산채굴권 등의 근대시설과 자원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다. 일본도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쟁탈에 참가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의 국운은 다시금 크게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손상되자 국내외적으로 고종의 한궁을 요구하는 여론이비등하였다. 고종은 파천초에 조칙을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것은경운궁이 당시에 수리중이었으므로 환궁시기를 늦추고 경운궁부근에 있는 구미공사관의 보호를 밭기 위함이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론은 정부의 대외의존자세를 비난하고 조속한 환궁을 요구하였다. 정부의 대신과 각계 요로에서도 환궁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친러파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국의 유생등이 상소운동을 개시하고 장안의 시전(市廛)들이 철시를 단행할 조짐을 보이는 등 여론이 더욱 거세어지자, 고종도 갑자기 환궁을 결심,파턴 1년만인1897년 2월20일에 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환궁 후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해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여 국호를 대한,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여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의의] 아관파천은 을미사변을 통해 불법적으로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세력에 대한 친러세력의 반발로 초래된 사건으로서 국왕의 무능.나약함과 정부지도자들의 파쟁상이 단적으로 노출되었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일보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이와같은 난국을 당하여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중들의 자주의식이 각성되었으나, 이와같은 움직임도 왕실과 보수집권세력의 반동으로 인하여 조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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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4.04.02
  • 저작시기2004.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5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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