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문화의 변화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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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정치문화의 변화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한국 정치문화의 변화에 대하여
- 한국의 하부 정치문화와 한국정치
- 엘리트 정치문화와 한국정치
- 대학생들의 정치문화와 정치참여
- 노동계층의 하부 정치문화와 변화
- 정당과 파벌
- 여당과 야당의 특징

본문내용

을 구성하는데 비하여 야당은 이러한 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결합하여 구성된다. 이러한 우형은 한국최초의 여당인 자유당의 성립과 또한 최초의 야당인 민주당의 성립에서부터 시작하였다.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인들이 창당한 민주공화당과 이에 대항하는 민간 정치세력들이 만든 민정당을 비롯한 야당들, 그리고 이들 야당들이 통합한 민중당과 신민당의 성립도 이러한 유형의 예들이다. 1980년의 517군부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인들이 만든 민주정의당과 이에 대항하여 12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창당된 신한민주당, 노태우정권이 3당합당으로 만들어 낸 민주자유당과 이에 대항하는 정당들의 결집체인 민주당의 창당 등이 모두 이러한 유형에 의한 것이다.
둘째로 여당이다 야당의 당원이 되는 사람들의 배경에서도 차이가 난다. 여당과 야당의 중심인물들인 국회의원들의 사회적 배경을 보면 여당에는 다양한 사회집단의 대표들이 많은 반면에 야당은 대부분이 직업 정치인들이다. 여당의 경우 정권의 초기에는 선거에서의 승리에 염두를 두어 명사들을 충원하지만 정권이 안정되면서부터는 독재자에 대한 충성심을 기준으로 하여 당직과 국회의원 후보가 결정된다. 야당의 경우에는 정부의 탄압과 방해로 인하여 새로운 인물들을 충원하기 어려웠으며 기존 야당정치인들의 측근에 있는 사람들이 주로 충원되었다. 이에 따라 야당의 경우에는 전문인들이 부족하였다.
셋째는 여당과 야당이 당내 민주화의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야당은 당내 민주화가 여당에 비하여 훨씬 더 활발하다. 여당은 지도자의 명령과 지시에 절대 복종하며 행정부가 추진하는 것은 무조건 지지한다. 여당에서 당내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이유는 당의 지도자가 인사권과 재정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건에서 당의 소속원들이 당지도자와 다른 의견을 제기하거나 반대를 하는 것은 스스로 정치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당의 구성원들은 지도자의 의견이 옳건 그르건 간에 무조건 이를 지지하는 것이 관행이며 이것이 되풀이되고 상례화됨에 따라 지도자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강화되었다.
여당에서는 당간부들의 선임이나 국회의원 후보의 공천을 대통령이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국회의원이 되지 못하거나 당에서 간부가 되지 못하면 정치인으로서의 의미가 없는 한국정치풍토에서는 당내 민주화가 이루어질 여지가 거의 없다. 모든 것이 대통령에 의해서 결정되어 온 여당에서 유일한 예외는 1992년에 민주자유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당내 경선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에 비하여 야당은 1959년대의 민주당 때부터 당내 민주화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당의 지도자는 계속해서 경쟁속에서 당원들의 선거에 의하여 결정되었고 당의 대통령 후보 또한 여러차례 민주적인 경선에 의해 결정되었다. 야당에서 당내 민주화가 활발한 것은 파벌의 결집체인 야당에서 지도자가 당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야당은 유명인물들을 중심으로 한 집합체로 성립되어 왔고 이 결과로 당내에는 여러 개의 파벌들이 병존하여 왔다. 따라서 당내 민주화는 여러 갈래로 분화되었던 야당들이 하나로 통합된 경우에 더 활발하였고 반대로 야당이 특정인물들을 중심으로 분리되어 여러개의 야당들이 공존할 때에는 각 당의 당내에서는 민주적 성격이 약화되고 당지도자는 전권을 행사하였다.
야당이 당내경선을 통하여 대통령 후보를 결정한 것은 1956년의 3대 정부통령선거의 후보로 신익희, 장면을 지명한 것이 처음이고 1960년의 4대 정부통령 선거의 후보 결정에서는 조병옥과 장면을 지명하였다. 1965년에는 두 개의 야당인 민정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결성한 민중당의 당수경쟁이 경선으로 이루어져 박순천이 윤보선을 누르고 당수로 선출되었다. 야당의 대통령선거 후보 결정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70년에 당시 40대였던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의 3인이 벌였던 경선으로 김대중이 2차 투표에서 지명되었다.
유신체제하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3차례의 당수경선을 벌여 김영삼이 2번, 이철승이 1번 당수로 선출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와 5공화국 초기에는 야당들이 관제야당이어서 정권을 잡은 군출신들이 지명하는 사람이 야당의 당수가 되었다. 5공화국 후기와 6공화국초기에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하는 두 개의 야당이 만들어졌고 이들은 경선 없이 각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통합야당인 민주당에서 김대중과 이기택 사이에 대통령후보를 추인하는 형식적인 성격이었다. 1992년 민주당에서는 정당사상 최초로 원내 총무를 당소속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결정하였고 최고위원,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하여 서울이 상위원장 등을 투표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야당에서는 중요 당선자의 선출과 대통령후보 지명에서 여러차례 투표로 결정하는 당내 민주주의를 실현하였다.
네 번째로 여당과 야당은 상대당에 대한 정치적 전략에서 차이를 보인다. 야당에 대한 여당의 전략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무리하여 밀어붙이는 유형이다. 13국회의 초기 2년을 제외하면 역대 국회에서 여당은 항상 국회의 과반수 의석을 넘은 막강한 우세를 유지하였다. 이에 따라 여당은 중요 법안이나 예산들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야당의 반대를 수의 힘으로 억누르거나 날치기 통과로 대응하는 행태를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정치행태는 자유당시절의 24파동(보안법 파동)을 비롯하여 민주공화당 시절의 3선개헌 통과와 월남파병 비준, 그리고 이외에 여러차례 반복된 날치기 통과, 민주정의당 정권과 민주자유당 정권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 된 날치기 통과 등에서 나타났다.
이에 대조적으로 여당에 대한 야당의 정치대결은 극한대결로 특징지어졌다. 수적열세를 이유삼아 대화와 타협보다는 극한적인 대립을 계속하여 온 것이 야당의 정치행태였다. 등원거부, 의사당점거, 단식투쟁, 폭력적 방법을 사용한 법안 저지 등은 야당이 자유당 시절부터 1990년대까지 계속하여 되풀이하여 오고 있는 행태이다. 이러한 야당의 대여투쟁행태는 권위주의 정치 시대에는 국민들의 동정을 이끌어내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권위주의 정치가 끝난 이후에는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거부감을 증가시켜 정치적 무관심을 증가시키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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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20
  • 저작시기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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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5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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