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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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근현대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1장 도쿠가와 시대의 유산

제2장 서양의 도전과 일본의 대응

제3장 도쿠가와의 멸망(1860~1868)

제4장 근대 국가의 건설(1868~1894)

제5장 메이지 천황과 메이지 헌법(1873~1904)

제6장 문화 수용(1860~1912)

제7장 산업화 : 제1단계(1860~1930)

제8장 자본주의와 국내 정치(1890~1930)

제9장 자주와 제국(1873~1919)

제10장 군인과 우익(1918~1933)

제11장 일본의 신질서(1931~1945)

제12장 제국의 승리와 패배(1937~1945)

제13장 군사 점령(1945~1952)

제14장 보수적 민주주의와 미일 동맹(1951~1972)

제15장 경제기적

제16장 쇼와 시대의 종언(1971~1989)

본문내용

년에는 해외 원조의 연간 총액은거의 75억 달러까지 증가되었다. 1988~1993년의 5개년 개획의 형태로 전환시켰다. 이 계획은 특히 토지 및 제품 가격이 내리고 주 5일 주 40시간 근무가 제도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이 5개년 계획에 대해서는 폭넓은 지지가 있었지만 여타 제안들 대다수에 대해서는 경제인과 정치가들이 강력한 논조로 반대하였다. 공공 보조금의 감축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서 1987년에 철도가 민영화 되었다. 1980년대에는 아시아 이웃 국가들간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는 쪽으로 정책이 크게 바뀌었다. 1983년 1월 방문하여 한국에 총 40억달러의 차관 및 신용 대부를 제공했고 중국과 일본의 공식 관계는 1972년에 재개되었다. 1978년이 되어서는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중일 관계도 신용과 투자의 문제로 바뀌게 되었다. 동남아에 대한 일본의 무역 확대는 1960년대에 급성장한 이후 약간의 반발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1973년부터 반 이스라엘의 자세를 취했고 일본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이 지역에 고위급 대신들을 파견하였다.
그 결과 원유 공급이 확보되었고 이란 산 원유를 계속 구매할 수 있었다. 1980년 이후 석유 문제는 점차 덜 중요해졌다. 일본의 소비가 감소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 시기에 일본 정부는 해외 관심사를 조정할 다른 정책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 정책은 태평양연안 정책으로 표현되었다. 이 제안은 1942년이라면 적절치 못했을 것이지만 점차 이 개념이 확대되어 태평양 지역을 위한 계획이 되었다. 이 구상의 미래는 어떠한 형태의 미일 상호 협력이 미일 방위 협정의 불평등성과 무역 분쟁 모두를 조정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여기에 외부로 확산된다면 태평양 지역의 경제 단위들 간에는 과거에 공영권을 위해 존재 했거나 구상되었던 것보다도 훨씬 복잡한 형태의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보수주의와 민족주의
자민당 내의 정치적 태도가 폭넓게 확산되는 상황에서 자민당이 구성한 내각들의 정책이 상당히 다양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자민당의 국회 내 위상은 많은 변동이 있었다. 자민당은 무역 분쟁과 오일쇼크로 야기된 경제적 불안 때문에 풍요의 건설자로서의 평판을 상실하였다. 그에 따라 자민당 의원수도 감소하였다. 한편 자민당은 통제력을 상실할 위험에는 처해 있지 않은 듯이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회 좌파 의원들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일부나마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를 엿 보았고 그리하여 실제로 구체적 조치에 관심을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오일쇼크에서 회복되는 속도에 맞추어서 자민당은 어느 정도 과거의 평판을 회복하였고 사회당을 따돌렸다. 이 시기의 수상들은 1950년대 60년대의 수상들과는 약간 다른 배경을 가지 사람들이었다. 한사람만 빼고 나머지 수상들은 성인 시절의 대부분을 정치가로서 활동했던 사람들이었다. 실제로 자민당은 공무원을 지배하거나 최소한 자기 길을 가는데 성들 사이의 불화를 이용할 능력을 갖춘 차세대 지도자들을 육성하고 있었다. 그 결과 중앙의 권력 중심이 정부 관료로부터 벗어나 국회와 자민당 쪽으로 약간 기울어 졌다.
재개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다. 재계는 여전히 정치가들이 필요로 하는 자금을 제공하였다. 다른 한편, 일개 정당인 자민당으로서는 기업의 돈과 제도정치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할 경우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할 위험성이 있었다. 그렇지만 일본 정치, 특히 보수 정치에서 자금 모금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1988년 말 언론과 텔레비전은 리쿠르트 사의 자회사인 코스모스사의 정치자금 기부에 관해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일로 전직 수상 나카소네, 다케시타 노보루가 연루되어 사임하고 후임인 우노 수상은 2개월만에 성추문에 연루되어 사임한다.
나카소네는 국제 사회에서 전후 일본의 역대 수상들 사이에 관례적이었던 것보다 높은 위상을 줄곧 유지해왔다. 비록 후임 수상들이 당 재정에 관련된 스캔들로 자민당의 위상을 훼손시키긴 했지만 자신이 당을 불확실성의 시기에서 구해 내 다시 한번 강력한 위상을 회복시켜 놓았다는 나카소네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있는 몇 가지 근거가 있었다.
나카소네의 이러한 주장을 가능케 해준 요소들 중의 하나는 일본에서 민족주의 또는 아시아인으로서의 자의식이 조심스럽게 부활하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보다도 일본인의 태도에 대해 언급해야 할 더 많은 것들이 있다. 일본인들에게는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윤리란 아직도 주로 유교를 뜻한다. 교육개혁에 관한 논의에는 거의 언제나 교육의 윤리적 기반을 회복하려는 몇 가지 언급이 있었고 그것들은 유교적 용어로 표현되었다.
이런 것은 확실히 서구적인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 그것을 아시아적이라 부르는 것도 현명치 않을 수 있다. 최근에 보이는 과거 회귀의 징후들 대부분은 자의식적으로 정의된 아시아적 정체성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의미의 민족 문화라는 맥락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메이지 시대로부터 일본 국가주의의 중심은 적어도 1945년의 패전 때까지는 황거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전후시기에 천황이 정치보다는 문화에 관련된 역할을 수행하고 그에 따라다니는 어떠한 정치적 정서의 잔류물도 주로 구세대 사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히로히토 천황이 1989년 1월 7일에 사망했을 때 이것은 단순히 히로히토 천황이 너무나 오랫동안 통치해 왔기에 전 국민이 익숙지 않은 환경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확신하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애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지나친 애도를 나타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과거와 연결시켜 주는 그 무엇 즉 불안정에 일종의 방어로서 갑작스레 천황제를 상기해 내 것일 수도 있었다. 분명 2월 24일의 천황 장례식은 세계의 지도자들을 집결시킨 국가적 행사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이 통일성과 일체감을 과시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적 행사였다. 그리하여 아키히토 천황의 치세에 일본이 최소한 대외적 위상과 관련해서 이러한 토대들 위에서 보다 자신감을 갖고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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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23
  • 저작시기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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