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A형 처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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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처용가(향가) 풀이

2.처용가(향가)의 배경 설화와 원문, 현대문 해석

3.처용가(고려가요)의 원문 및 현대문 해석

4.향가 처용가와 속악가사 처용가 비교

본문내용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귀를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였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망해사 또는 신방사라 하였으니 용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처용가(현대어 풀이)
신라 성대 밝고 거룩한 시대
천하 태평 나후의 덕 나후 : 해와 달을 가리는 신으로 처용의 위용을 비김
처용 아비여
이로써 늘 인생에 말씀 안 하시어도
이로써 늘 인생에 말씀 안 하시어도
삼재와 팔난이 단번에 없어지도다 삼재 : 불,물,바람의 재앙 팔난: 많은 괴로음
아아, 아비의 모습이여. 처용 아비의 모습이여
머리 가득 꽃을 꽂아 기우신 머리에
아아, 목숨 길고 멀어 넓으신 이마에
산의 기상 비슷 무성하신 눈썹에
애인 상견 하시어 온전하신 눈에 애인상견 : 사랑하는 사람을 서로 보시어
바람이 찬 뜰에 들어 우굴어지신 귀에
복사꽃같이 붉은 모양에
오향 맡으시어 우묵하신 코에 오향 : 다섯 가지 향기
아아, 천금을 머금으시어 넓으신 입에
백옥 유리같이 흰 이에
사람들이 기리고 복이 성하시어 내미신 턱에
칠보를 못 이기어 숙어진 어깨에
길경에 겨워서 늘어진 소매에 길경 : 길함과 경사로움
슬기 모이어 유덕하신 가슴에
복과 지가 모두 넉넉하시어 부르신 배에
태평을 함께 즐겨 기나긴 다리에
계면조 맞추어 춤추며 돌아 넓은 발에 계면조 : 애조를 띤 가락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누가 지어 세웠는가?
바늘도 실도 없이, 바늘도 실도 없이
처용의 가면을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많고 많은 사람이여
모든 나라가 모이어 만들어 세웠으니
아아, 처용 아비를 많고 많은 사람들이여.
버찌야, 오얏아, 녹리야
빨리 나와 나의 신코를 매어라 신코 : 짚신의 앞 끝의 뾰족한 곳, 짚신이 벗겨지지 않게 이곳을 조여맴
아니 매면 나릴 것이다. 궂은 말이
신라 서울 밝은 달밤에 새도록 놀다가
돌아와 내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아아, 둘은 내 것이거니와, 둘은 누구의 것인가?
이런 때에 처용 아비가 보시면
열병신 따위야 횟갓이로다.
천금을 줄까? 처용 아비여
칠보를 줄까? 처용 아비여
천금도 칠보도 다 말고
열병신을 나에게 잡아 주소서 열병신 : 열병을 일으키는 귀신
산이나 들이나 천리 먼 곳으로
처용 아비를 피해 가고 싶다.
아아, 열병 대신의 소망이로다.
갈래 - 고려 속요
형식 - 비연시
주제 - 역신을 몰아 내는 처용의 위용과 기상
감상
고려 속요 처용가는 향가 '처용가'와 마찬가지로 처용이 역신을 몰아내는 축사의 내용을 지닌 일종의 무가이다. 처용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고, 역신에 대한 처용의 분노가 절실하게 나타나 있어서 희곡적 분위기가 강하다. 향가 '처용가'의 일부분이 들어 있으며, 처용희의 일부로서 가창되었다.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는 고려에 와서 궁중의 나례(잡귀를 쫓기 위한 의식)와 결부되어 '처용희', '처용무'로 발전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제야에 구나례를 행한 뒤 두 번 처용무를 연주하여 그 가무와 노래가 질병을 몰아내는 주술적 양식으로 바뀌었다.
출전 - 악학궤범, 악장가사
처용가(處容歌)
<양주동 역>
현대어풀이
서울 밝은 달밤에
밤 깊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내 아내) 것이지마는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은(내 아내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노래는 여러 해석이 있으나 대체로 축사(逐邪 : 나쁜 귀신을 쫓아냄)나 벽사진경(벽사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進慶:좋은 일을 맞이함)의 무가(巫歌)로 본다.
고려 시대에도 처용에 대해 속요 '처용가'가 있으며 처용의 설화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의식무(儀式舞) 또는 연희로 계속하여 계승되기도 한다.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퇴각했다는 내용과 관련해서는, 아무리 악신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우리의 무속적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엿볼 수 있다.
처용은 동해 용왕의 아들로 신라에 와서 벼슬을 했다는 설화 속의 인물이다.
배경설화
<삼국유사> 권 제2 기이 제2 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제 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연(連)하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왔다. 이때 대왕이 개운포(開雲浦)에서 놀다가 돌아가려고 낮에 바닷 가에서 쉬고 있었다.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일고, 천지가 캄캄하여 앞길조차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뢴다. "이것은 동해 용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소관 관리에게 칙령을 내려서 용을 위하여 그 근처에 한 절을 세우게 하기로 하였는데, 이 칙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다 개었다. 그래서 거기를 개운포(開雲浦)라 불렀다. 동해의 용은 기뻐서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어전에 나타나서 왕의 덕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의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성으로 들어가서 왕의 정사를 도우니 그의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러 있도록 하고 또 급간(級干)이라는 관직까지 주었다. 처용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해서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 집에 가서 몰래 동침했다. 처용이 밖에서 자기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누워 있는 것을 보자 이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다.
이 때에 역신은 모양을 나타내고 처용의 앞에 꿇어 앉아서 "제가 공의 부인을 흠모하여 지금 범했는데, 공이 보시고도 노여워 안하시고 도리어 노래를 부르시니 이 후로는 공의 화상만 있는 곳이라도 결코 들어가지 않고, 피하리다." 하고 사죄하였다. 그로부터 나라 풍속에 처용의 화상을 문간에 붙여서 역신의 해를 피하곤 하였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처용가 소개)
핵심정리
연대 : 신라 헌강왕
종류 : 8구체 향가
성격 : 축사(逐邪)의 노래
주제 : 축신(逐神)
의의 :
① 벽사진경(酸邪進慶)의 민속에서 형성된 무가(巫歌)임
② 고려와 조선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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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15
  • 저작시기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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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5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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