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성문화 - 성적 욕망의 제도적 장치 ; 기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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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기녀의 탄생

2. 기녀의 성적도구화

3. 기녀의 유형

4. 기녀의 운명

본문내용

'과 '백(魄)'이라는 두 가지 영혼을 가지고 있다. '혼'과 '백'은 무엇인가? 사람이 처음 태어나면 백이라 부르고, 이미 백이 생기고 양기(陽氣)에서 움직이면 혼이라 부른다. 사람의 정기를 혼이라 하고, 형체를 백이라 한다. '혼'은 정신적인 영(靈)이며, '백'은 육체적인 영으로, 전자가 죽어서도 후손들의 제사를 받는 영원한 존재라면, 후자는 죽은 후 시체가 썩을 때까지만 존재하는 유한한 존재이다.
고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정기인 혼이 형체인 백을 떠난다고 생각했다. 또 사람이 죽으면 혼을 불러 백에 되돌린 뒤에 땅에 매장해야 되며,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떠돌이 귀신이 된다고 여겼다. 따라서 사체가 된 '백'을 가능한 오래도록 보존하려고 옥 같은 것들을 부장품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통치자가 죽으면 통치자의 도구나 노리개에 불과했던 여자들과 함께 매장시켜 사후 세계에서까지 그의 소유가 되도록 했다. 이것이 순장 제도이다.
순장 제도는 전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사회 현상으로, 일반적으로 원시 사회 말기에서 계급 사회 초기에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하상 시기 노예의 주인인 귀족이 기녀를 순장시키는 일이 성행하였고, 또 이들을 죽여 조상이나 신령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좋아하였다.
춘추 전국 시기 통치자들이 기녀를 순장하는 제도는 보편화되었다.
이 시기 처첩·자녀·기녀[노예]는 주인의 사유 재산이자 도구에 불과했다. 주인이 사후에도 이들을 거느리고 싶어하면 생순(生殉 : 산채로 매장하는 것)하거나 살순(殺殉 : 죽여 매장하는 것)해다. 순장의 규모는 죽은 자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차이를 보였는데, "천자의 순장에는 많게는 수백 명, 적게는 수십명 동원됐으며, 장군이나 대부의 순장에는 많게는 수십 명, 적게는 몇 명만을 동원했다.
이후로 노예나 여자를 대신하여 나무나 진흙 혹은 금속 등으로 만든 인형을 부장품으로 이용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산사람을 순장하는 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기녀들은 영기, 가기, 사기를 막론하고 대다수가 비참한 삶을 살았다. 어떠한 기녀들은 부유한 탕자의 첩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버림받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이부인, 조비연(趙飛燕) 등과 같은 극소수의 아름다운 기녀들은 귀족 계층으로 진입하여 부귀 영화를 누렸다. 기녀들의 신분 상승 조건은 우선 미모로 황제나 대관, 귀족들의 총애를 받아야 하고, 둘째는 수완을 발휘하여 환심을 사야 하며, 셋째는 아들이 있어야 했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없으면 불가능했다.
진(秦)나라 때 한단(邯鄲)의 회(진시황의 어머니), 조위(曹魏)의 변황후(卞皇后 : 조비의 어머니) 등은 아들이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끝까지 지위가 유지됐다. 그러나 조비연의 경우는 성제에 의해 황후가 되었지만 아들이 없어, 평제(平帝) 즉위 후에는 다시 서인(庶人)이 되어, 최후에는 자살을 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양한 시대부터 중국으로 들어온 불교는 남북조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불교의 절은 산속에 있으며, 많은 수의 남자를 중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비구니로 만들었다. 그때는 또 도교도 발전하여 여자들이 여자 도사(道士)가 되기도 했다. 비구니 혹은 여자 도사가 되면 어느 정도의 생활은 보장되었다. 때문에 이것은 당시 기녀들의 귀착점이 되기도 하였다. 기녀가 비구니가 되고 여자 도사가 되었다고 하여 생활 보장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당시 비구니는 항상 종교적인 가무 활동을 거행하여 신과 인간을 즐겁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에서는 기녀의 장점을 발휘하도록 했다.
Ⅲ. 결론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기 의식 여부와는 무관하게 끊임없이 생식하여 종족을 번성시킨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생식은 단순히 자연적, 동물적인 행위가 아니라 진보된 성(性)의 사회적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 풍속은 개인의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이 사회 전체 이익에 복종한 표현인 것이다. 성문화는 생존본능의 관념적인 표현이며, 세계 각 지역의 원시 시대 인간들의 보편적인 현상 중의 하나이다.
태고적의 인류는 생산력이 매우 낮고 자연 조건이 위험한 환경에서 생존 투쟁을 하였으므로,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번성시키는 일이 절박했으며, 생명을 유지하고 전파하기 위해 성행위를 했다. 따라서 그들의 성 풍속은 생명에 대한 예찬이며, 생명을 창조하는 즐거운 수단의 일종이었다. 우리가 이 당시 사람의 낮은 도덕 수준과 비문명 등을 고려한다면, 그들의 성문화는 의도 면에서는 순결한 것이었으며, 불순함이나 음란한 관념은 없었다.
따라서 중국에서 강조되고 숭배되는 것도 자연계의 보편적인 생명력이며, 의식 있는 사상성과 위력이 아니라 생식 방면의 창조력이다. 자연계의 보편적인 생식력에 대한 숭배는 암수 생식기 모양으로 표현된 자연물이나, 여성의 가슴과 복부, 둔부를 강조한 조각상 등을 받드는 것 등으로 나타났다.
유가의 경전인「주역」의 64괘가 음양 양성의 결합이라는 데서 출발하였고, 8괘의 원리는 도가에 의해 발휘되어 방중술의 이론적 기초를 형성했다고 한다. 또한 도가의 시조인 노자는 "그윽한 암컷의 문은 천지의 근원"이라 하고, 여성의 질의 생육 능력으로부터 천지의 기원을 이끌어냈으며, 남녀 성교로부터 인생에 있어서의 '무위수유(無爲守柔)', '치허수정(致墟守政)'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이렇듯 중국인들은 성문화를 의도적으로 금기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음식남녀(飮食男女)'는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이라는 맹자의 말처럼 식욕과 색욕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나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중국도 보수적인 성관념을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여러가지로 조사를 해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선시대에 유교와 성리학의 영향으로 성에 대해 금기시하고, 보수적, 폐쇄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고대 중국인들은 유교와 도교의 방중술의 발달로 성을 결코 비하하거나 금기시하지 않고, 서구의 어떤 민족 못지 않게 상당히 자유롭고 활발한 성관념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 나름대로의 개방된 성의식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키워드

중국,   성문화,   기녀,   중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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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19
  • 저작시기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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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56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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