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부터 세계대전까지의 일본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메이지유신부터 세계대전까지의 일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메이지시대
Ⅱ.제국주의의 등장
1.청일전쟁
1.1 배경
1.2 개전
1.3 전후
2.러일전쟁
2.1 배경
2.2 원인
2.3 경과
2.4 결과
2.5 한국에 미친 영향
Ⅲ.제국주의로 가는 길
1.일본의 군국주의 성장
1. 1 군국주의(軍國主義)
1. 2 일본의 군국주의
1.2.1 경제적 성장
1.2.2 전후처리와 경제위기
1.2.3 일본에 대한 견제
1. 3 군국주의의 전개
1.3.1 만주침략
1.3.2 일본사회의 우익화
1.3.3 중일전쟁의 발발
Ⅳ.제 1차 세계대전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
참고자료 3.
참고자료 4.
참고자료 5.

본문내용

은 채로 남아 있다. 국가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1860년대 이후 일본은 자신을 아시아로 볼 것인가, 아니면 서구로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해 왔다. 메이지(明治) 시대 가장 영향력있는 지식인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 1901)는 『탈아론(脫亞論)』에서 일본이 발전하기 위해선 아시아와 절연하라고 부르짖었다. 그 후 일본은 아시아의 서구(Asian West)로 행세했다. 그러던 일본이 아시아로 돌아온 것은 1930~1940년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표방하면서다. 아시아를 서구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재건할 사명이 일본에 있다고 허울좋은 변명을 했지만 대동아공영권은 제국주의의 또다른 야욕에 불과했다. 당연히 아시아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했으며, 1945년 일본은 마침내 패망했다.
중학교 역사왜곡 교과서를 최종 승인한 고이즈미 정권은 아시아 경시 태도를 감추지 않고 또 한 차례 탈아를 시도하고 있다. 미국에 친일 성향의 조지 W. 부시 공화당 행정부가 들어서 중국 위협론을 거론하고 미일 동맹 강화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일본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편승, 지역 패권국가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직시한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 기고가인 윌리엄 파프는 7월 2일 중국을 적으로 보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글을 통해 미국의 대중(對中) 강경책은 일본의 국가주의만 키우는 셈이라고 논평하고 고이즈미 총리 등장 이후 평화헌법의 수정을 제안하는 등 역대 여느 정부보다도 국가주의적인 시각이 강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 중략-
2. 침략의 상징, 야스쿠니 신사
태평양전쟁의 피해국에게는 해방일이지만 도발국인 일본인에게는 패전일인 8월 15일이면 해마다 보수우익 세력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모여 군국주의의 부활을 외친다.
도쿄 한복판인 지요다(千代田) 구의 구단(九段)이라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도쿄돔 야구장의 2배 크기로,황궁 옆의 9만 9천㎡의 광대한 부지에 자리잡고 있다. 1869년 메이지(明治)일왕의 지시로 전몰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도쿄 쇼콘샤(招魂社)가 전신으로 1879년 야스쿠니 신사로 개칭했으며 이후 일왕을 숭배하는 일본 신도(神道)의 성지가 되었다.
이곳에는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진 무진(戊辰)전쟁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침략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11개 전쟁에서 숨진 군인과 군속 246만 6천여 명의 위패가 있다. 일왕을 위해 전사하면 계급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누구나 다 야스쿠니 신사의 신이 되기에 다른 신사와는 달리 제신이 무제한으로 늘어가고 있으며 이 방대한 제신 전부가 주신(主神)으로 모셔지고 있는 특수성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일본 전역 10만여 개에 달하는 신사 중의 신사로 불린다.
제국주의 시절 야스쿠니는 전투적 국가주의를 조장하는 국영 신사였다. 특히 일제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벌였고, 이듬해 2월에는 야스쿠니 신사에서 국민궐기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야스쿠니를 전쟁동원 체제의 장소로 활용했다. 1978년 도조 히데키 전 총리를 비롯한 도고 시게노리 당시 외상 등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슬그머니 합사(合祀)되면서 국제적 주목을 받는 민감한 현장이 되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겉으로는 종교시설로 가장했지만 실은 전쟁을 테마로 한 거대한 국민 학습장이다. 정문에 들어서면 15m는 족히 넘을 듯한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과 마주친다. 일본 육군의 창시자이자 제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인 그는 금방이라도 옆에 찬 칼을 빼내 들 듯한 자세이다. 이 동상은 야스쿠니 신사가 어떤 시절을 그리워하고, 누구를 추모하는 곳인지를 웅변하고 있다.
동상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대형 함포같은 각종 병기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근대 일본이 겪은 전쟁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다. 태평양전쟁 때 자살비행을 감행한 가미가제 돌격대원의 동상인 특공용사의동상'이 버티고 있으며, 전함 야마토(大和)의 46㎝ 특대 포탄과 군마(軍馬)군견(軍犬)의 위령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뒤쪽으로는 군인칙유(천황이 내린 제국 군인의 덕목)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유슈칸(遊就館)이란 문패가 달린 건물은 일종의 전쟁박물관이다. 1층 중앙홀엔 태평양전쟁 때 활약한 제로센(零戰) 전투기가 자리잡고 있다. 러일전쟁 때 사망한 해군 중좌의 사진이 바다의 군신(軍神)이란 제목과 함께 붙어 있다.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이면 누구나 야스쿠니의 군신이 될 수 있다. 2층에선 영령의 말씀이라는 특별 전시회가 개최되는데 주로 가미가제 특공대원의 유서가 벽을 장식하고 있다.
야스쿠니의 상징은 역설적으로 흰 비둘기다. 1만 마리 중 1마리 꼴로 나온다는 흰 비둘기를 대량 방육하며 평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곳은 봉양하는 음식부터 보통 신사와 다른 별격(別格)신사이다. 담배깡통식량맥주 같은 군인식의 제사상이 꾸며진다. 아악 대신 군악대의 주악(奏樂)이 연주되기도 한다.
아시아의 해방일이자 일본의 패전일인 8월 15일이면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우익들의 총집결장 역할을 담당한다. 이곳의 참배객 숫자는 해마다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작년 8월 15일 당일의 참배객은 5만 5천여 명. 이는 전년보다도 5천 명이 늘어난 숫자다. 올해는 고이즈미 총리까지 공식적으로 참배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섰으니 얼마나 많은 우익세력이 모여 군국주의 부활을 노래할지 우려된다.
야스쿠니 신사는 패전 직전까지 국립묘지 역할을 하는 국영신사로서 천황숭배와 군국주의 이념의 메카였다. 패전후 맥아더 군정에 의해 일반 신사로 격하되었지만 보수우익 인사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는 마찬가지다. 고이즈미 총리가 국내외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참배하기를 고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고문헌
안정환, {상식 밖의 일본사}, 샛길, 1995.
井上 淸 저, 서동만 역, {일본의 역사}, 이론과실천, 1989.
村上忠郞 저, 장진한 외역, {천황과 천황제}, 도서출판 한원, 1989.
박경희 엮음,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일빛, 1998
김희영, 이야기 일본사, 청아 출판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두산동아 백과사전

키워드

  • 가격2,500
  • 페이지수16페이지
  • 등록일2004.06.25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7285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