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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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倭의 稱號考
◈漢籍상의 倭國
◈야마토정권의 倭
◈倭國傳
1)倭國의 위치와 여러 小國
2)倭人들의 服色
3)倭人들의 風俗
◈倭人이 百濟系라는 견해
◈倭가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견해
◈倭와 七支刀
◈百濟와 倭의 교역
◈倭가 百濟의 侯國이라는 견해
◈한국 古代史에서 倭가 차지하는 위치
◈任那의 실체
◈아직기와 왕인박사
◈倭의 침략기사
◈느낀점
◈참고문헌

본문내용

일기도(一岐島)를 가리킨다. 임나연정(任那聯政)은 광개토왕(廣開土王)이 대마도왜, 일본열도왜, 백제, 신라, 가야를 복속시킨 후 복속지를 통제하기 위하여 A.D 400년에 복속지 내 요지(要地)에 위치한 10개국으로 만든 연립정부(聯立政府)이다. 이 연정(聯政)의 치소(治所)는 임나에 있었다. 그 때문에 이 연정을 임나연정이라 불렀다.
광개토왕은 A.D 400년에 보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공격한 왜(구태백제와 응신조왜 군사)를 물리치고 왜를 추격하여 임나가라를 점령한 후 이어서 대화왜와 구주왜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후 신라, 가야, 백제와 대마도왜, 일본열도왜를 복속시킨 광개토왕은 복속지를 통제하기 위하여 복속지 중 요지(要地)에 위치한 10개 국으로 임나연정(任那聯政)을 만들어 그 치소(治所)를 대마도에 두었다. 임나연정과 관련된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나온다. 「실성이사금 7년(A.D 408년) 왜국인(倭國人)이 대마도에다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저장하여..후략」 이 문구는 광개토왕이 A.D 404년에 고주몽고구려의 대방계(帶方界)를 침범한 구태백제와 응신조 왜 잔존무리들을 물리친 후 대마도에 다시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비축한 것을 적은 것이다. 위 임나연정의 설치목적은 송서(宋書)에 나오는 왜왕 무(武)의 발언과 같이 광개토왕이 복속시킨 백제, 신라, 가야, 대마도, 일본열도를 군사적으로 통제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따라서 임나연정의 임무는 신라와 백제간의 통로통제, 백제와 일본열도간의 통로통제, 신라.백제.가야.대마도.일본열도 지역 통제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임나연정의 역할 중 대부분은 통제를 하였지만 백제는 통제하지 못했다고한다.
◈아직기와 왕인박사
백제가 고구려와 대결하면서 국력을 크게 강화할 근초고왕 21년 무렵에 전남 강진 방면을 통로로 한 왜와의 외교교섭이 이루어졌을 때 아직기와 왕인이 일본에 파견되어 백제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인물로 알려져 있는 왕인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일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그 이름이 나오고 일본 역사 발전에 크게 공헌한 인물로서 존경받고 있다.
두 기록에 의하면 먼저 건너간 사람은 아직기로 왜의 요청으로 파견되어 태자의 스승이 되어 그곳 학자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다가 아직기는 학문이 나은 본국의 박사 왕인을 왜왕에게 추천하자 이에 왜국의 정중한 요청으로 왕인이 파견되어 일본에 한문이 전수되기에 이른다.
왕인은 왜국에 건너갈 때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가서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하며, 또 왜국 왕의 요청으로 군신들에게 경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처럼 왕인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한학이 전해졌으며, 그들 사이에서 유교의 사상과 법률의 지식 등이 확산될 수 있었다. 왕인의 자손들은 대대로 일본에서 살면서 史가 되었다고 하는데, 왕인의 활동은 백제 문화의 일본 전파에서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의 침략기사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혁거세 8년(서기전 50)부터 소지왕 19년(497)까지 대략 5백50여년 동안 49회에 걸쳐 왜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 33회가 왜의 신라 침략 기사다. 그후 약 1백60여년 동안 왜 기사는 보이지 않다가 백제가 멸망한 문무왕 5년(665)에야 다시 나타난다. 백제본기에는 왜 관련 기사가 아신왕 6년(397) 처음 등장해 비유왕 2년(428)까지 7회에 걸쳐 나온다. 그후 1백80년 동안 보이지 않다가 무왕 9년(608)에 다시 나타나 의자왕 때 두번 보인다.
간단한 내용을 살펴보면 「신라본기」*혁거세 8년-왜인이 군사를 몰고와 변경을 침범하려다 시조가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돌아감. *나해 이사금 13년-왜인이 동쪽 변경을 침범, 이벌찬 이음을 보내 막았다. *조분 이사금 3년-왜인이 갑자기 와서 금성을 에워쌌다. 왕이 친히가서 싸우니 사람머리 1천여개를 얻었다. 4년-왜병이 동쪽 변경을 노략질함. 이찬 우로가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배를 태우니 모조리 죽었다. *유례 이사금 4년-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고, 불을 지르고 1천명을 사로 잡아갔다. 7년-왜병이 사도성을 공격해 함락시킴. 12년-신하가 '왜인이 여러번 성읍을 침범해 백성들이 살 수 없으니 백제와 더불어 의논해 나라를 침이 어떠한가?' 하니 서불한 홍권이 '백제는 속임수가 많아 그들과 모책을 하기 어렵다.'하니 왕이 '옳다'고 했다. 이외에도 *홀해 이사금 3년, 35년, 36년. 눌지 마립간 5년, 25년. 자비 마립간 6년, 20년 등 왜병의 침략기록은 많았다. 「백제본기」에도 *의자왕 20년-백강 어귀에서 왜군을 만나 4번 싸워 다 이기고 그의 배 4백척을 불태웠다.
◈느낀점
사실 이번 왜에 대해 공부하기 전까지 '무능하고 원시적 생활을 하는 오랑캐' 정도로만 생각해왔다. 그리고 왜에 대해서 '왜놈들..'하며 부정적으로 말하는 어른들을 보며 자연히 나도 왜소하고 약소한 민족인 줄로 알았다. 하지만 왜에 대해 조사를 하고나서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일본이 물론 중국과 우리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기는 하였지만 죠몬토기, 전방후원분 등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며 계승 발전 시켜왔으니 말이다.
끊임없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고 기술이나 체제를 모방하는 의존적이고 약소한 나라란 생각에서 섬이라는 그 나라의 특수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러한 다른 나라의 문명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려는 일본의 독특한 모습을 보게되었다. 일본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느낀점은 우리가 너무 감정적으로 일본을 바라보지 않았나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본을 가깝고도 먼나라라고 하는 점을 봐서도 그렇다. 나는 이번 공부로 일본에 대해서 좀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봐야한다는 점을 배웠고, 왜에 대해 좀더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정종목 「KBS 역사스페셜」효형출판, 2001
·문정창 「韓國史의 延長 古代 日本史」인간사, 1989
·김석형 「초기조일관계사(하)」사회과학출판사(북한), 1988
·김기섭(편역) 「고대 한일 관계사의이해-왜」이론과 실천, 1994
·김부식 「삼국사기」하서출판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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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7.15
  • 저작시기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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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6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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