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호태왕비의 서체가 6C 신라 금석문서체에 미친 영향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광개토호태왕비의 서체가 6C 신라 금석문서체에 미친 영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1. 머리말
2. 6C 신라금석문의 서체

(1) 장법의 특징
(2) 필획의 특징
(3) 결구의 특징

3. <광개토호태왕비>의 서체와 6C신라금석문의 서체비교분석

(1)낱자 분석
(2)이체, 고자분석

4. 맺는 말

본문내용

찾을 수 있다.「참6-21(마)」의 결구의 경우도 거와 근의 크기가 매우 차이가 나는데 「착」, 「서」의 예와 같다.
「촌」「촌6-17(마)」는 예서법이다.
「촌」 19-20(적),26-16(창), 3-18(남), 4-14(무), 5-3(남), 6-4(창) 등은 예서의 필획과 결구임을 알 수 있다.
「추」24-21(창)은 예서의 필획과 결구로 <광개토호태왕비>와유사하다.
「추」5-13(황)은 필획과 결구가 능숙한 해서로 표현되었고 7-14는 수평의 필획과 결구가 아직 예서를 면치 못하였다.
「충」모두 중에서는 예서의 필획과 결구요 심에서는 해서로 발전하여 서로 혼합된 서체임을 알 수 있다.
「취」23-15(창)은 결구와 필획이 <광개토호태왕비>와 같다.
「태」별법과 날법이 해서법으로 된 1-1(마), 4-15(마), 1-3(북), 3-7(황)은 후반기에 해당하고 필획의 굵기가 같은 예서법은 전반기의 3-11(봉)가 해당된다.
「토」5-3(창)은 필획과 결구가<광개토호태왕비>의 예서법이다.
「통」적성비, 황초령비 마운령비의  은 <광개토호태왕비>의 범주에 있는 필획이다.
「파」명활산성비의 파는 유수세가 강조되어 결구가 왼쪽으로 기울었다. 이런 결구는 중기의 적성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6-2(냉)은  가 <광개토호태왕비>의 산수세와 같으며 피도 예서법이고 결구는 역시 적성비와 같다.
「팔」1-6(청)은 별법과 날법이예서법이고 5-14(황), 7-15(마), 9-10(남)은해서법이다.
「패」굵기가 같은 예서필획이나 결구가 해서법으로 기울어 있다.
「합」창령비에서  은  로 되었는데 이는 6세기 신라 금석문의 특징이랄 수 있다. 좌우부방 모두가  로 되어있다.
「행」10-4(마)는 필획과 결구가 <광개토호태왕비>와 같은데22-24(창)은 좀 다르다. 우선  에서 첫 획이 팔분법이다. 7-1(명)도 <광개토호태왕비>의 범주에 있다.
「향」마운령비, 남산신성비 모두 필획과 결구가 <광개토호태왕비>와 같은데 여기서 6세기 후반에 까지도 <광개토호태왕비>의 영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화」황초령비, 마운령비 모두 구가 네모 반듯한 점으로 보아 아직 예서의 결구가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회」6-25(황)은 필획과 결구 모두 <광개토호태왕비>를 그대로 닮았다. 황초령비에도 그 영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획」황초령비와 마운령비가 같은 시기의 글씨임에도 6-3(마)는 아직 예서의 필획을 확인 할 수 있다. 황초령비의 마지막 획은 반날로 필획과 결구가 정확하다.
「훼」2-5(냉), 3-10(냉), 4-2(냉), 2-12(봉), 1-13(적)는 구가 위로 올라가 있고 오른쪽 변에 비하여 크기의 차이가 심한 결구법은 <광개토호태왕비>의 결구법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1-13(적)에서는 유기세가 매우 강조되었다. 그런데 창령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남산신성비에 와서는 결구법도 달라지고 필획도 해서의 필획으로 능숙하게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써 전반기의 결구는 <광개토호태왕비>의 결구를 따랐음을 알 수 있고 후반기부터는 필획과 결구가 해서법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2)이체,고자분석
「고」의 필획은 북조의 해서 필획이나 왼쪽변이 <광개토호태왕비>의 결구와 같아 보인다.
「기11-11(적)」의 이체로 세가 생략되어 운에 목을 하였다. 이런 결구는 <광개토호태왕비>와 북제의 제손반용처명묘지(563)에 와서야 볼 수 있다.
「나」의 결구는 희평석경이나 석문송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이들 보다는 <광개토호태왕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특히 냉수리비의  을  로 한 점은 다른 곳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루」적성비의 이런 결구는 <광개토호태왕비>와 같은 결구이다.
「보」결구를 알아보기 힘들다. 다만 보6-2(명), 보9-7(남)에서처럼 산에 소를 놓아 <광개토호태왕비>와 같은 결구로 보인다.
「수」형에  를 쓴 자형이다. <광개토호태왕비>에서 확인할 수 있어 고려와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결구의 기간이 오래지 않기 때문이다. 북위에서는 요백다조상기(476) 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이 글자는 본디  으로 2-10(마)는 <광개토호태왕비>의 필획과 결구의 예서법이다. 이럼 점에서 문화의 유전을 확인할 수 있다. 2-10(마)의  은 <광개토호태왕비>의 필획과 결구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광개토호태왕비>의 예서문화와 북위의 해서문화가 빚어낸 서사문화가 신라서예의 근간을 이루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6세기에의 신라서사문화는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비>예서문화와 북위의 해서문화가 혼합되어 있어 시대구분이 어려우나 전반적으로 6세기 전기의 서체는 필획과 결구가 <광개토호태왕비>예서와 팔분이 많고 후기에는 북위해서의 서풍이 지배적이다.
「 」는 호의 약자로 역시 <광개토호태왕비>에 먼저나오고 북위 때 사용되었음을 알 수다.
4. 맺는말
장법도 복잡한 형태를 띄는데 정방형의 <광개토호태왕비>장법이 사용되었으며 그 예로는 <영일냉수리비>(503), <울진봉평비>(524), <창영비>(561), <북한산진흥왕순수비>(568), <황초령진흥왕순수비>(568), <마운령진흥왕순수비>(568), <남산신성1.2.9비>(591) 등이 있다. 6세기의 신라서적은 전반기는 팔분과 예서장법으로 후반기의 금석은 해서장법이 많아 장법의 분기점으로 볼 수 있다.
필획은 <광개토호태왕비>의 예서필획과 북조의 해서필획이 혼용된 필획으로 기필에서 역입과 수필에서 회봉이 약화된 필획이다. 황초령비를 제외한 서적의 필획은 대부분 그의 영향아래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서 필획의 금석인 냉수리비, 봉평비는  법이 없는 예서필획이고 적성비는 팔분필획이 그 중 많다. 6세기 신라서적의 특색은 예서의 필획과 해서의 필획을 혼용하였다.
결구에 있어서 팔분의 결구는 <단양적성비>(551)가 있고 예서의 결구는 봉평비를 들 수 있다.
6세기 신라서체는 고구려의 <광개토호태왕비>의 예서나 팔분에서 북위, 북제와 같은 북조풍의 해서로 넘어오는 과도기의 서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문화에 있어서도 이체, 간자를 통해보면 간접이 아닌 직접적인 문화교류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 가격1,3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09.08
  • 저작시기2004.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575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