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를 집중 탐구한 레포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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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퇴계이황를 집중 탐구한 레포트입니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글을 시작하며

2. 퇴계 이황의 일생

3. 퇴계 이황의 인간상

4. 퇴계의 핵심사상

5. 퇴계의 일대기 주요연보

- 참고문헌

본문내용

주가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자질을 갖춤으로써 덕치에 의한 백성을 위하는 왕도 정치가 가능하다는 종래의 유가 관념을, 다시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이기설적 존재론의 근거 위에서 총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것은 일본의 이른바 ‘명치의 교육 칙어’라는 사상적 배경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
퇴계 사상의 의의
- 퇴계의 학문적인 사상의 특색을 살펴보면 양명학을 배척하고 정주학의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정주계 중에서도 주리적 이기 이원론의 철학을 견지하면서, 특히 사칠설과 같은 심성론의 이론적 탐구를 병행하는 주지주의적 경향이 짙었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로 한국 성리학의 특색이기도 하다. 퇴계 이후 양명학은 한국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중국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한국의 양명학은 거의 전무에 가까운 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기에 치중하는 철학은 이미 화담에서부터 두드러지는 반면, 이에 치중하는 철학은 희재와 이언적에서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하지만, 이러한 경향들이 각기 주기론, 주리론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오로지 퇴계의 사단칠정론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 중의 주리론은 퇴계로 말미암아 완전히 사림파의 철학이 되어, 정통 철학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퇴계의 사칠설은 당시에 학계의 관심을 집중심켰음은 물론, 후대 학자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어 마침내 조선 성리학자들의 필수적인 문제로 되었고, 이러한 문제 의식이 결국 조선조 성리학 풍토 위에 처음으로 학파의 형성을 가져 왔다. 또한 인물동성이론 등의 논쟁으로 연결되어 조선조 성리학은 다른 나라들의 그것과는 달리 심성설의 주조를 띤 정주계 성리학으로서 내향적 이론 추구의 경향으로 발전하였다.
사칠론을 둘러싸고 퇴계 학파, 율곡 학파와 주리파주기파, 영남 학파기호 학파라는 학파의 형성을 가져 온 사실 자체가 조선 성리학이 퇴계의 사상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인 한국화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이 더욱더 강한 독자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러한 의미의 한국화의 발전이 본격화하였다는 점에서 퇴계의 사상은 한국 성리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정받는다고 하겠다.
퇴계의 일대기 주요 연보 퇴계 이황 홈페이지 참조 수정
연 도
나 이
내 용
국내외 사건
1501년
1세
연산군 7년 안동군에서 진사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동국여지승람 수정
1502년
2세
생후 7개월만에 부친 찬성공 별세
1506년
6세
편모 슬하에서 농사와 길쌈을 도와가며 6세부터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을 비롯하여 소학 등을 배움
1512년
12세
숙부인 송재공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움. 이 무렵 이마가 유난히 넓다하여 광상아라는 애칭으로 불림
일본사신과 임신조약 체결
1521년
21세
김해 허씨와 결혼
마젤란 피살
1523년
23세
6월에 장자 준 출생. 이해에 처음으로 상경하여 태학 (성균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연구함
1527년
27세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2위로 합격, 10월에 차자 채 출생. 동년 허씨 부인 사망
1530년
30세
권전의 질녀인 안동 권씨와 재혼
1537년
37세
모친 박씨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남
김안로 사약받음
1544년
44세
10월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하여 명나라 예부관원을 크게 감탄케 함
사량진왜란
1545년
45세
을사사화
1556년
56세
도산에서 주자서절요를 편찬 완성함. 12월 향약을 초안함
1559년
59세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는 소장을 올리고 송계원명리학통록을 저술함
임꺽정의 난
1560년
60세
고봉 기대승에게 답하는 편지형식으로 철학적 대명제인 4단7정론을 저술함. 이해에 도산서당이 완공됨
1561년
61세
3월에 절우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산수간을 주유하면서 도산기 같은 명문을 남김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지음
1570년
70세
12월8일 모든 장사 준비를 한 뒤 한서암에서 앉아 있는대로 고요히 세상을 떠남. 임종직전 시생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분부를 함
1571년
3월에 예안 건지산 남쪽에 장사지냄
레판토 해전
1592년
임진왜란
1600년
문집이 이루어짐
글을 마치며...
- 1000원 지폐에 그려진 퇴계 이황 선생의 초상화를 본 것이 계기가 된 이번 레포트는 나름대로 혼성모방적인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직접적으로 퇴계에 대하여 조사를 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고 필요한 부분을 습득하거나 인터넷을 활용하는 방법 등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용한 부분이나 발췌한 부분은 주석으로 달아서 출처를 밝혔고, 어려운 단어는 직접 사전을 찾아보아 각주를 달았다. 책을 읽으며 한자가 빈번히 등장하였는데 정말 필요한 경우가 아닌 한 대부분 한글로 바꾸어 표기했다. 퇴계 이황에 대하여 여러 가지 면모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그중 가장 활발한 것은 학자로서의 삶이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초점을 거기에 맞출 수도 있었지만 그의 이론은 내가 감당하기에 혹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심오한 지식이었다. 그로 인해 이기론과 같은 대부분의 철학과 이론을 허술하게 혹은 간단하게 다룬 것을 인정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퇴계 이황은 학자로써 평생을 살았으며, 매순간 학문에 정진한 위대한 학자의 표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근검절약하고 청렴결백한 관리의 이상적인 모델이었고 교육자로서도 훌륭한 스승이었다. 학문만 아는 책벌레가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는 풍류를 즐길 줄도 아는 멋쟁이였다. 과연 그는 우리나라에서 손꼽을 만한 위인 중의 한명이며 어떤 나라의 위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 참고 문헌
퇴계 선생 일대기. 권오봉. 교육과학사. 1997
한국 유학과 리기 철학. 송영배 금장태 외 지음. 예문서원. 2000
퇴계 선집. 이황 저. 윤사순 역주.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3
퇴계의 삶과 철학. 금장태.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퇴계 철학의 연구. 윤사순.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5
이퇴계의 실행유학. 권오봉. 학사원. 1997
퇴계선생과 도산서원 http://members.nate.com/hyosang/frame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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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07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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