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광주지방의 청년학생운동과 지역사회
본 자료는 7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해당 자료는 7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7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머리말

2. 청년단체의 결성

3. 청년운동 지도부와 이념
1) 초기 청년운동과 부르주아청년
2) 청년운동의 혁신과 지식청년

4. 청년.학생운동과 지역사회
1) 청년운동과 학생층
2) 맹휴투쟁을 둘러싼 지역사회의 대응

5. 맺음말

본문내용

亞日報』 1922. 5. 13, 1924. 11. 28, 1925. 4. 28, 9. 15, 1926. 2. 4, 2. 9, 3. 1, 5. 12, 1927. 2. 14, 1928. 12. 19 ; 『中外日報』 1928. 11. 3, 1929. 9. 9
노석정은 대동단에 참여해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받았다. 감옥에서 나온 노석정은 신간회 광주지회에 참가했다.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3.1운동사 (3)』, 562쪽 ; 光州直轄市史編纂委員會, 앞의 책(1993), 476-478쪽 ; 『中外日報』 1929. 9. 9
7월 8일 학부형대회에서 적극 활동한 김창용과 김시중도 나주와 장성에서 신간회 지회에 참여했다.
9.2학부형대회를 주도한 부형 중에는 변호사가 3명이나 포함되었다. 김재천 송태환 이정상이 바로 그들이다.
) 北村友一郞, 앞의 책(1917), 143쪽 ; 梁東柱 編著, 앞의 책(1956), 47쪽
일제 통치구조에 참여한 사람도 상당수에 달했다. 김상순(1923∼1927) 박계일(1920∼1927) 이정상(1920∼1923)은 광주면협의원을 지냈으며, 박계일은 당시 광주면 副長으로 재직중이었다(1924-1928).
) 光州直轄市史編纂委員會, 앞의 책(1993), 96∼97쪽
이계익은 오치면의 소문난 부자로서, 노석정 등의 대동단원으로부터 경고문과 포고문을 받고 1백원을 제공했던 인물이다.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3.1운동사 (3)』 , 562쪽 ; 光州直轄市史編纂委員會, 앞의 책(1993), 476-478쪽
강태성은 기독교 장로였다.
9.2학부형대회를 주도한 부형들은 대개 교육운동에만 참여했다(강익수.김기호.김상순.박계일.송태환.이정상).
) 민립대학기성회 광주지방부(김상순), 광주교육보급회(강익수.김기호.장영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창립기성회(김기호.김상순.박계일.송태환.이정상)
장영규는 동경 유학시절 2.8선언에 참여했으며, 1923∼1924년에는 광주청년회와 광주노동공제회에서 활동했다.
) 『東亞日報』 1923. 8. 1, 8. 15, 1924. 4. 8
9.2학부형대회를 주도한 부형중 신간회 광주지회 간부로 활동한 사람은 강태성 뿐이었다.
) 『中外日報』 1929. 9. 9
이상과 같이 끝까지 맹휴생들을 지지했던 강경파 부형들은 주로 신간회를 통해 민족운동에 참여했다. 반면 타협파 부형들은 주로 정치색이 없는 교육운동에만 참여했다. 일부 타협파 부형들은 면협의회를 통해 식민지 통치권력의 제도권 정치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두 부류의 정치적 경향성은 군자금을 모집했던 노석정과 그에게 경고장을 받고서야 마지못해 자금을 제공했던 이계익의 관계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4. 맺음말
광주지방의 청년운동은 30대의 부르주아 청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23∼1924년을 거치면서 청년운동 중심세력은 20대의 소부르주아 청년들로 세대 교체되었다. 청년운동계의 혁신세력으로 등장한 청년들은 청년운동 세력이 '민중 본위의 신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일제에 대한 전민족적 투쟁만이 아니라 민족 내부에 존재하는 계급적 불평등 관계에 대해서도 투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의 이론적 전술적 무기는 '사회과학', 곧 사회주의였다. 사회주의 사상과 이론에 심취한 청년들은 공산주의 비밀결사에 가담하였다. 1920년대 중후반 광주지방의 청년운동을 주도한 것은 이들 사회주의 청년들이었다.
사회주의 청년들은 학생층을 '학생청년', 즉 청년층의 일부로 간주했기 때문에 교육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교육의 방향을 조선인 중심의 민족교육, 노동자.농민 자제들을 위한 민중 본위의 교육으로 설정하였다. 청년회 학교는 그러한 교육방침을 실현하는 대체학교, 장래의 민족운동을 이끌어 갈 주체를 양성하는 공간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제도권 학교에 재학중인 학생들을 조직화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1920년대 중후반 다양한 학생조직들이 공개적으로 혹은 비밀리에 결성된 것은 그러한 노력의 소산이었다.
당시 청년들은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을 넘나들며 활동했다. 학생비밀결사나 맹휴투쟁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사회로 진출한 후, 자연스레 청년운동에 합류했다. 청년운동을 하다가 학교로 되돌아가서 학생운동에 합류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독특한 구조를 활용하면서 청년운동은 학생층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1920년대 중반부터 광주의 각 학교에서는 맹휴투쟁이 활성화되었다. 맹휴투쟁에 대한 지역사회의 대응방식은 단일하지 않았다. 맹휴에 개입한 졸업생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타협적인 부류의 졸업생들은 맹휴생들의 일상적 요구 몇 가지를 학교측이 수용하고 맹휴 지도부가 학교측에 대해 사죄하는 선에서 맹휴를 수습하고자 하였다. 반면, 청년운동계와 연결된 졸업생들은 맹휴생들의 정치적 민주주의적 요구까지 학교측에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학부형회, 학부형대회로 표상되는 지역사회의 대응방식은 맹휴의 진전에 따라 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각종 사회운동이나 신간회 등에서 활동하던 부형들은 일제.학교당국과의 교섭을 통해 맹휴생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부형들의 노력은 일제.학교당국의 완강한 태도에 부딪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부형들은 끝까지 맹휴생의 이해를 옹호하고자 했지만, 교섭력이 벽에 부딪힌 순간에도 그것을 돌파할 수단을 갖지 못했다.
맹휴가 장기화되고 일제.학교당국과 맹휴생 사이의 대립이 고조되면서 일제.학교당국의 방침에 순응하려는 부류들이 표면으로 부상했다. 그들은 '자식의 장래를 위해서'라는 논리로 부형들의 이기심을 자극했다. 그들은 학생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일제.학교당국과 타협함으로써 맹휴 대열을 결정적으로 약화시켰다. 이들 타협파 부형들은 평소에도 일제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만 민족운동에 동참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와 같이 1928년 여름 광주고보 맹휴 당시 청년운동 세력, 졸업생, 부형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맹휴과정에 개입하였다. 그들이 시종일관 맹휴투쟁을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지역사회의 대응방식이 단일하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추천자료

  • 가격3,000
  • 페이지수21페이지
  • 등록일2004.09.13
  • 저작시기2004.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667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