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공산화 과정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북한의 공산화 과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공산주의란?

2. 공산주의 이론의 실천
1)소련의 공산화
2)아시아, 유럽의 공산화

3.북한의 공산화

본문내용

역에 진주하였으며, 8월 24일 평양에 진격한 소련군은 "소련군의 관할구역을 북위 38도선 이북으로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38도선은 소련군의 남하저지와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 위해 군사적 목적에서 설정된 잠정선이었지만, 결국 소련의 책략에 의해 정치적 분할선이 되어 우리 민족과 국토가 남북으로 갈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곧이어 북한지역은 소련군의 점령정책을 통해 공산화되었다. 우선 북한지역의 소비에트화는 각 도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제로부터 접수한 행정권을 인계받아 행정의 공백을 메우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북한지역 점령군 사령관인 로마넨코 소장은 평양에 있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평남지부(대표 조만식)와조선공산당 평남지부(대표 현준혁)를 통합하여‘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45. 8. 27)가 구성되었으며, 유사한 단체들이 북한의 나머지 4개 도에도 속속 조직되었다.
1945년 10월 8일 로마넨코는 북한 5개 도에 설치되었던 임시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였는데, 회의 결과 1945년 10월 28일「5도행정국」이 발족되었다. 5도행정국은 소련군정 하에서 각급 인민위원회를 중앙에서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기구였다.
한편 소련점령군의 초미의 관심사는 소련에 충성하는 공산당을 효율적으로 조직하는 문제였다. 서울에는 박헌영 중심의「조선공산당」(’45. 9. 11)이 조직되어 있었으나, 소련군 사령부는 북한지역의 조선공산당 5도책임자를 중심으로「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만들었다. 북조선 분국의 설치는 북한에 서울과 별개의 공산당을 조직하여 김일성으로 하여금 그 지도권을 장악케 하려는 소련군 사령부의 의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1945년 12월 17~18일 분국 3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북조선공산당」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김일성이 위원장이 되었다. 북한에서 소련점령군의 도움 아래 공산당이 결성됨에 따라 공산당 지배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그후 북조선공산당은 김두봉의 신민당과 합당(’46. 8)하면서 「북조선로동당」으로 개칭하였으며, 공산당 일당지배를 위한 내적 통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강력한 중앙통치기구를 계획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1946년 2월 8일“북조선 정당·사회단체 5도행정국 및 각도 인민위원회 확대회의”를 개최하여「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5도행정국의 기능을 계승함으로써 북한에 공산당이 지도하는 단독 정권기관이 등장하게 되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최고 집행권을 행사하는 동시에 임시법령을 제정하고 공포할 권한을 함께 갖는 기관이었다.
소련점령군 당국은 김일성을 통치자로 만드는 작업과 함께, 1946년 11월에 북한의 각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토록 하고, 1947년 2월에는 읍·면·리 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를 통해 도·시·군 인민위원회를 구성한데 이어, 최고입법기관으로서 북조선 인민회의의 설치를 결의하고, 1947년 2월 21일 북조선 인민회의를 통해「북조선 인민위원회」가 공식 출범하였다.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1948년 4월 29일 북조선 인민회의는 특별회의를 통해「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 초안을 승인했다.
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고, 9월 2일부터 9월 10일까지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에서 헌법을 채택(9. 8)한 후, 9월 9일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내각을 승인함으로써 소련의 위성국이 한반도 북쪽에 탄생하게 되었다. 정권수립 이후 1949년 6월 24일 남로당과 북로당 제1차 전원합동회의를 개최하여 합당함으로써 북한의「조선로동당」이 공식적으로 창당되었고, 위원장에는 김일성이 선출되었다.
소련은 북한정권이 성립하기까지는 물론, 그 이후에도 계속 배후조종과 감독을 계속하였다. 최근 러시아가 공개한 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이 1948년 1월 20일자로 스티코프 장군에게 북조선 인민회의 의제와 회의 개최 허락을 요청한 사실과 당시 조·소간에 11개 협정이 체결된 후 북한에서 시행되어져야 할 제반 조치들을 나열해 놓은 1949년 3월19일자 스티코프의 편지 등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2) 김일성의 권력 공고화와 유일체제의 형성
해방이후 북한에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세력, 현준혁·박헌영 등 국내 공산주의세력,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투쟁을 한 김두봉 등 연안파, 소련군과 함께 들어온 허가이 중심의 소련파, 김일성 추종세력 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존재하였다. 조선노동당은 김일성 중심의 북조선 공산당과 김두봉 중심의 조선신민당, 박헌영 중심의 남조선노동당이 시차를 두고 합당하여 창당된 것이며, 여기에 소련파가 가세하였다. 김일성은 소련의 비호하에 테러와 통일전선전술 등 이중정책을 구사하며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점령 초기 현준혁과 조만식을 제거한 김일성은 6·25전쟁과 그 직후 정적들을 숙청해 나가면서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이후 김일성은 1957년 5월 30일 당 상무위원회를 열고‘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을 단행하여 전 북한사회를 공포분위기로 몰아갔다. 이러한 와중에서 김두봉, 최창익, 한빈 등 연안파는 완전히 축출되었으며, 소련파의 상당수는 소련으로 피신했으나 박창옥 등은 처형되었다. 남로당계와 연안파·소련파에 대한 숙청을 마무리지은 김일성은 자신과 함께 항일 빨치산운동을 전개했던‘빨치산파’의 일부까지도 숙청하였다. 한마디로 김일성의 권력 공고화 과정은 피의 숙청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67년 5월 당 중앙위원회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당의 유일사상체계를 튼튼히 세우며 온 사회를 혁명화, 로동계급화하기 위한 투쟁”을 적극 전개하기로 결정하여 주체사상이 북한의 통치이데올로기로 확립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이 당시부터 김일성은 영도와 사상의 유일성을 확보하면서‘수령’이라고 불리우기 시작하였다.
1970년 제5차 당대회 무렵 북한의 지도층은 김일성에 대한 충성파로 일색화되었으며, 이른 바‘유일영도체계’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김일성 유일체제는 1972년 12월 개정된「사회주의헌법」을 통해 제도화되었다.

키워드

  • 가격1,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4.09.21
  • 저작시기2004.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6816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