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가>,<회소곡>,<도솔가>를 통해 본 국가 형성기 상고시가의 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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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구지가>,<회소곡>,<도솔가>를 통해 본 국가 형성기 상고시가의 제 문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내린다는 기본 줄거리는 대개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령 <낙도부>에는 "桑宮繭館, 區別有矩, 后率九嬪, 躬勅女工."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회소곡>의 부대 기사나 후인이 지은 <회소곡> 역시 그러한 기본 줄거리를 답습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발견할수 있다.
① 농업을 국가 생산력의 근간으로 삼은 한자문화권에서는 양잠과 적마를 장려하기 위해 왕비가 몸소 친잠 행사를 주관하여 생산 증대를 위한 수범을 보였다.
② 이 행사에는 주로 귀족의 부녀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양잠의 여신을 제사하는 선잠(先蠶)
선잠은 상고시대 황제(皇帝)의 비인 누조( 祖)가 백성들에게 양잠을 처음으로 가르친 덕을 기리어 그를 제사하는 행사다.
까지 수반되는 장려한 궁중 의례로 치러졌다.
③ 행사가 끝난 뒤에는 그 공적을 고과하여 상벌을 내렸으니, 이는 농업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정책적 차원의 고려였다.
④ 이러한 친잠 의례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읊은 시가들은 대체로 국가나 백성들로 하여금 양잠과 적마에 힘쓰기를 권장하는 교훈적인 노래이거나 후비의 덕을 송축하는 찬미지사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 사실들과 <회소곡>의 부대 기사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추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① <회소곡>이 가창된 가배는 음력 7월과 8월에 걸치는 적마 시기 직후에 거행된 것으로 이는 백성의 기본 의생활에 필수적인 적마를 장려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배려된 것으로 추측된다. 육부를 둘로 나누어 왕의 딸이 각각 관장하여 적마를 행했다는 것은 친잠 행사와 마찬가지로 여공(女功)에 수범을 보이고자 한 의도였을 것이다.
② 가배 행사에는 육부 내의 모든 부녀자가 왕녀의 인솔 아래 모여 적마를 행했으며, 한달 후인 음력 8월 보름날에 그것을 마치고 가무와 백희(百戱)가 동원된 큰 제례(祭禮)가 베풀어졌다. 이는 의례화된 행사인 선잠(先蠶) 제례와 그 성격을 같이 한다.
③ 적마를 마친 뒤 그 실적의 다소를 고과하여 진 편이 이긴 편에 술과 음식을 내었다는 것은 곧 친잠 행사 후 실적에 따라 상벌을 내렸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파악된다.
④ 이 행사 때 진 편의 한 여자가 기무(起舞)하며 탄식조로 부른 것을 후인이 부회해 지었다는 <회소곡>은 사서의 기록이라는 비중에 비추어 볼 때 막연한 애상조(哀傷調)의 서정요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적마를 권장하는 교훈적인 시가이거나 왕녀의 부덕(婦德)을 송축하는 찬미지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굳이 예를 든다면, <회소곡>은『후한서(後漢書)』권57에 나오는 양잠에 대한 다음과 같은 민요(民謠)와 상당히 흡사할 것이다. 초기국가 형성기라는 시대에 나왔던 다른 시가들을 보더라도 이 노래만 장편일 리는 없으며 또한 주변의 일상적인 자연물을 서술하고 그것에서부터 시적 감흥을 흥기하여 진솔하게 주제를 다루어내는 내는 수법을 그대로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감(張堪)이 어양(漁陽) 태수가 되어 농업을 장려한 결과 온 고을이 번성하고 부유하게 되자 백성들이 이런 노래를 불렀다.
뽕나무에는 잔가지 없고
보리는 나란히 길솟았네.
우리 사군(使君) 선정 베푸시니
즐겁기가 한량 없네.
"張堪爲漁陽太守, 勸耕稼, 以致殷富, 百姓歌曰, '桑無附枝, 麥秀兩岐. 張君爲政, 樂不可支.'"
일단 정치 권력은 획득하였으나 여러 측면에서 불안한 조짐을 느꼈던 국가 형성기의 지배계급들이 <도솔가>·<동경곡>·<회소곡>의 창작 및 반포를 통해 노렸던 정치적 의도는 매우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과거 권력과의 상관 관계상 심리적으로 동요와 이반(離反)을 보이기 쉬운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심정적인 복속감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음악과 문학이 결합된 상징을 조작하여 그것을 암송하게 하는 일이 매우 유용했을 것이다. 정치적 불안기나 권력 교체기에 흔히 낡은 권력의 퇴장과 새로운 권력의 등장을 암시하는 참요(讖謠)나 동요(童謠)가 성행했던 역사적 경험이 이를 반증해준다. 참요나 동요가 비교적 피지배자의 부정적 심리를 반영하는 반면, <회소곡> 유형의 노래는 찬미를 통한 긍정적 심리를 부추김으로써 정치 권력의 신장과 유지에 효율적으로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농업 중심 사회에서 권력의 토대가 되는 농업 생산력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회소곡> 같은 노래의 창작이 매우 긴요했을 것이다.
실제 신라 이후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양잠과 적마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가진 정치행사로 전승되어왔다.『고려사』의「악지(樂志), 아악(雅樂)」중 '등가(登歌)와 헌가(軒架)가 음악을 아뢰는 절도(節度)'에는 군주가 직접 참여하는 공식적 행사에 사용되었던 음악의 연주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순서 가운데 두 번째가 선농친향(先農親享), 세 번째가 선잠(先蠶), 네 번째가 문선왕묘(文宣王廟)임을 보아 국가의 공식행사에서 양잠과 적마에 관련된 의례가 주요 행사로 간주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잠(先蠶) 의례에서는 격안지곡(格安之曲)·정안지곡(靖安之曲)·용안지곡(容安之曲)·화안지곡(和安之曲)·환안지곡(桓安之曲)·흠안지곡(歆安之曲)의 여섯 가지 아악을 연주하였으니, 이러한 장엄한 의식의 음악도 그 근원은 신라 가배 행사 때 불리워진 <회소곡>에서 연유되었을 것이다. 조선조에 와서도 한양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동잠실(東蠶室)을 두어 환관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고, 한강 아래 원단동(圓壇洞)에 새로 잠실을 설치했으며, 성의 서쪽에 서잠실을 두어 별좌(別坐)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또 이 두 잠실이 고치를 생산하여 승정원에 바치면 그 실적의 다소를 고과하여 상벌을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東蠶室在城東峨嵯山下, 宦官主之. 今又設新蠶室於漢江下圓壇洞, 亦令宦官主之, 而西蠶室在城西十里餘, 卽古衍禧宮, 置別坐二人, 專任之, 其後別坐移屬尙衣院. 夏則養蠶, 蠶畢仕于本院, 東西各 絲納于承政院, 校功多少而賞罰之." (『 齋叢話』권10)
이러한 풍습과 행사를 통해 양잠과 적마를 국가 경영의 우선 순위에 두고 정책적으로 권장 독려했던 왕조시대의 정치 행태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 행사를 읊었던 노래를 통해 당시의 정치적 상징조작의 양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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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20
  • 저작시기2004.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70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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