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육파철학 (상키야 철학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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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도 육파철학 (상키야 철학 外)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1. 인도철학의 체계화
2. 상키야 철학의 전개
1) '상키야'의 의미
2) 까삘라와 상키야 수뜨라

2. 본론
1. 상키야 철학의 개관
2. 인중유과론(因中有果論)
1) 인중유과론
2) 인중유과론의 근거
3) 인중유과론의 구분
3. 쁘라끄리띠
1) 세계의 원인
2) 쁘라끄리띠의 존재의 근거(추론되어짐)
3) 세 가지 구나
4) 구나의 특징
4. 뿌루샤
1) 상키야의 자아관(自我觀)
2) 자아의 존재근거
3) 자아의 다수성 논증
5. 세계의 전개
1) 시발점
2) 과정을 통한 산물
3) 전개과정의 결과
6. 지식론(知識論)
7. 해탈론(解脫論)
8. 신관(神觀)

3. 결론

본문내용

는 상징이다. 그리고 문장의 이해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상키야 철학은 베다에 의한 진술만을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리시들의 직관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베다에는 오류가 없는 절대적 타당성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7. 해탈론(解脫論)
전술했듯이 상키야는 세상을 고통으로 보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구하는 사유체계였다. 고통이 지멸된 상태, 즉 해탈에 이르는 길을 찾는 방법은 물질세계의 전개과정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가능해 진다.
뿌루샤의 해방은 가능한 것인가? 즉 상키야의 해탈론을 논하기 위해서는 속박(束縛)의 상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브라끄리띠는 해체와 진화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전개의 시작은 쁘라끄리띠와 뿌루샤와의 접속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특히 뿌루샤는 쁘라끄리띠 최초의 전개물인 붓디와 가장 가까이에 있다. 그 두 요소간의 접합상태에서 경험과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욕망이 발생하고 그것으로 인한 까르마가 쌓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붓디는 뿌루샤가 쁘라끄리띠에 접합되게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뿌루샤는 일반적인 물질처럼 실제로 혼합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뿌루샤의 본질은 순수한 의식이며, 언제나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이 두가지가 만나서 섞이는 것으로 인식하는가? 그것은 뿌루샤가 방관자
) 바가바드 기따 14장 25절에 따르면 '명예를 얻을 때에나 또 모욕을 당할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은 사람은, 전쟁터에서도 적군과 아군을 따로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항상 어떤 상태분별적인 판단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람을 일러 구나를 초월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쁘라끄리띠에서 나온 세 개의 구나, 즉 삿뜨와, 라자스 그리고 따마스를 초월하여 이것들만이 모든 행동의 행위자이며, 멀리서 관조하며 꿰뚫어보는 이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구나를 초월하는 자는 이미 해탈에 이르렀으며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임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 때문이다. 즉 뿌루샤와 붓디를 혼동하여 마치 붓디가 겪는 모든 마음의 상태들을 뿌루샤가 체험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상키야철학에 있어서의 속박이란 뿌루샤와 붓대를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무지를 말하는 것이다.
붓디는 사뜨와의 성질을 지배적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주 섬세한 물질이어서, 뿌루샤의 빛을 반사하여 마치 그 자체가 의식이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붓디의 상태가 뿌루샤가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이 상키야 철학에서 말하는 무지인 것이다. 물에 비추어진 달이 물결에 따라서 흔들리게 보일 때 그것은 달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달의 형상이 수표면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무지로 인하여 인간은 달이 움직이는 것으로 알게된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상키야 철학에 의하면 이러한 분별지의 가능성은 붓디 자체 내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따라서 쁘라끄리띠는 뿌루샤의 해방이라는 영적인 목적을 위하여 부단히 활동하고 있으며, 쁘라끄리띠는 본래 뿌루샤를 속박하려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해탈의 열쇠는 붓디가 쥐고있는 것이다. 일단 붓디 내에 이러한 분별지가 생기게 되면, 붓디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인식과 행위도 그치게 되며 뿌루샤도 그 본래의 모습인 순수한 독존(獨存)의 상태로 몰입되는 것이다. 상키야 수뜨라의 저자 중에 한 명인 이슈와라 끄리슈나는 쁘라끄리띠를 수줍은 무희에 빗대어 설명한다. 일단 뿌루샤는 무희인 쁘라끄리띠의 춤을 관람한다. 그러나 곧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고, 쁘라끄리띠도 뿌루샤에 의해서 자신의 춤이 보여졌다는 것을 알게되면 춤추는 것을 곧 멈추게 된다는 것이다.
8. 신관(神觀)
결과로서의 세계가 원인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 그러나 신(神)이 세계의 원인인가? 신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라고 상정한다면, 상키야의 이원론에 의해서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는 능동적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궁극적인 원인은 영속적이면서도 동시에 항상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쁘라끄리띠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만 비지성적인 존재인 쁘라끄리띠는 세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지적인 자극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감독관으로서 신이 존재한다면 신이 행위하는 것이 되므로 이것은 인정될 수 없다. 또한 신이 감독관이라면 '완전무결한 신은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은데 왜 쁘라끄리띠를 관조하여 세계를 만들어지게 하였는가'라는 의문을 갖게된다. 또한 신이 절대 선(善)의 의지로 세상을 창조하도록 했다고 하더라도 상키야 철학은 세상을 기본적으로 고통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신은 정당화 될 수 없게된다. 결과적으로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쁘라끄리띠가 대상의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데 필요 조건일 뿐이라는 것이다. 쁘라끄리띠는 오직 개별적인 자아인 뿌루샤의 선을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세계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3. 結論
상키야 철학이 강조하는 분별지, 즉 이원론은 일상적인 자아를 부정하는 형태로 서술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뿌루샤를 자각하는 것이다. 그 분별지를 얻은 자가 수명을 다하면, 육신과 같이 쁘라끄리띠로부터 생성된 것은 멸(滅)하고, 새롭게 생기는 일이 없이 윤회를 단절하여 오직 독존인 뿌루샤로 돌아간다. 이것이 해탈이며, 상키야 철학의 궁극적 목적일 것이다. 결국 상키야의 이원론은 뿌루샤로의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다. 또한 상키야 전변설에서 이원은 정신세계라는 일심의 양면을 원리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상키야 철학의 전변설이 지닌 성격은 유심적 이원론이라고 파악된다. 상키야 철학의 전변설을 상투적인 이원체계로 받아들일 경우, 해탈 이후의 뿌루샤와 쁘라끄리띠가 어떠한 상태로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 둘은 독립된 별개의 실체로서 존재할 것이다. 결국 상키야 철학은 고통의 물질세계에서 뿌루샤를 발견하여 순수무구한 상태의 독존을 추구하는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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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0.30
  • 저작시기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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