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의 전개와 정국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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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붕당정치의 전개와 정국의 변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사림의 집권과 붕당정치
1. 16세기 후반 이후의 정세와 지배계층의 대응
2. 붕당정치의 전개
- 선조 (1567-1608)
-광해군 (1608-1623)
-인조 (1623-1649)
-효종 (1649-1659)
-현종 (1659-1674)

II. 붕당정치의 변질과 정국의 변화
1. 붕당정치의 변질과 일당전제화
-숙종 (1674-1720)
-경종(1720-1724)
2. 탕평론의 대두
-영조(1724-1776)
-정조(1776-1800)

III. 세도정국과 정치부재화

참고 : 붕당정치계보 (도표)

본문내용

붕당정치의 기반은 사회적으로는 재지사족, 즉 사림세력이었고 경제적으로는 지주제였다. 17세기 후반 이래 재지사족의 사회경제적 기초였던 지주제와 신분제가 동요하면서 사족의 향촌지배, 나아가 붕당정치의 기반이 더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즉 농법의 개발과 수리시설 확충 등에 힘입은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농산물의 상품화에 따른 국지적 시장의 발달과 상품유통 전개 등의 요인에 의해 농민층의 분해가 급속히 전개되었다.
농민층의 분해는 두 방면에서 촉진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소유권에 입각한 지주제가 발전하면서 나타난 것으로, 양반·토호층의 토지집적과 경영쇄신으로 인하여 토지를 상실하고 농토에서 밀려나는 몰락 농민이 양산되었다. 다른 하나는 농민층 내부의 경영확대현상으로, 활동적이고 능력이 있는 일부 농민들은 노동력을 통해 집약적 농법경영을 확대하여 토지경영규모를 늘려가니, 이로 인하여서 농토에서 쫓겨나는 농민들이 많아졌다. 지주제의 확대와 농민층의 분화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소농민층의 몰락은 결과적으로 그에 토대한 지주제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였다. 토지의 상품화가 진전됨에 따라 이러한 현상은 더욱 진전되었다. 기존의 지배층들 중 일부는 지주적 지위를 상실하고 전호로까지 전락하기도 하였다.
농업경영의 변동과 생산력 증대에 의해 농민층 분화가 급속히 진전되는 가운데 기존의 봉건적 사회구성 역시 크게 동요하였다. 경제력이 신분상승의 수단이 되면서 봉건적 신분제는 허구화되어갔다. 그리하여 양반호구의 격증, 상민호구와 노비호구의 격감 등의 추세 속에서 기존의 신분질서는 더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특히 18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노비신분제는 결정적으로 분해되어갔다. 이에 따라 종래 경제적 기반과 신분적 특권을 토대로 기층민을 지배했던 양반지주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는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냈다. 즉 18세기 후반까지 향회·향안이 지속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노비인구의 격감과 양반인구의 증가는 재지사족의 신분제적 운영원리의 구현체였던 향회·향안의 기능을 무력하게 하였다. 붕당의 여론집결지와 세력기지로 기능하였던 서원(書院)도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 토대한 붕당정치도 더이상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을 만큼 변질되어갔다.
향촌사회질서의 변화에 따라서 기층사회도 변모하고 있었다. 과거와는 다른 기반과 입장을 지니게 된 기층민들은 대립·저항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추구했다. 흔히 촌(村)·동(洞)·이(里)로 불려지는 마을단위의 기층민과 그들의 조직들은 전통적인 공동체적 생활방식을 지키면서 존재해왔는데, 종래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은 대체로 지주제적 구조 속에서 제약되어왔고, 사족들의 지배구조하에 구속되기를 강요당했다.
17세기 중엽 이래 향촌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함께 사족지배체제가 동요를 일으키자 말단사회의 기층민은 기층민대로 두레나 촌계(村契)를 중심으로 자체 결속력을 강화해나가며 자신들의 성장욕구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항조(抗租)운동이나 거세(拒稅)운동이 그것이다. 기층민의 요구나 입장변화는 18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특히 노비들의 도망이 급격히 진전되고 있었는데, 이는 신분제를 질곡으로 느끼고 있던 그들의 신분해방운동이기도 하였다. 노비들의 일부는 고공(雇工) 등을 통해 경제력을 키워가면서 양반층으로까지 신분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노비세력·농민세력·중인세력·서얼세력을 포함한 광범위의 기층민들은 나아가 사회운동까지 전개하였다. 도시에서의 검계(劒契)·살주계(殺主契)와 같은 비밀결사활동과 농촌에서의 미륵신앙운동이 그것으로서, 그들은 이를 통해 사회변혁까지도 꿈꾸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때로는 정국의 변화에도 영향을 끼쳤으니,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庚申換局), 1689년(숙종 15)의 기사환국(己巳換局), 1694년(숙종 20)의 갑술환국(甲戌換局)은 그같은 징후를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사회적인 제반여건이 달라진 상황 속에서 정치형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즉 특정붕당에게 정치의 전권을 장악하게 하는 환국(換局)이란 형태의 정치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붕당정치의 이념이 파행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자료 출처 : 『한국사』한길사, 중세사회의 해체
참고자료2
붕당정치계보
(색칠된 부분은 그 당시의 집권 또는 주도세력)
선조
동서분당(1575): 훈척계에 대한 태도와 이조전랑직 문제
서인(온건파/기성세력/심의겸)
동인(강경파/신진세력/김효원)
정여립의 모반(1589 기축옥사)으로 세력 약화
남북분당(1591)
: 대서인 태도와 정철의 건저의 문제
(세자책봉문제)처벌관련 대립
남인(온건파/이황계)
북인(강경파/조식계)



소북
(사림의
청의 유지)
대북
(훈척계
참여)
청소북
(남당)
탁소북
(유당)
골북
육북
인조
북인의 회퇴변척(이언적/이황 폄하), 광해군의 임해군/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위 후에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함.
효종
서인
남인
북인
현종
1차(기해)예송
: 효종이 죽자 계모 조대비의 상복기간 대립.
송시열 등 서인은 기년설, 윤휴 등 남인은 3년설.
서인채택으로 확실한 주도세력이 됨.
2차(갑인)예송
: 말년에 효종비 죽자
조대비 복제 대립.
서인은 9개월대공설,
남인은 기년설. 남인채택.
청남
(대서인태도
강경파)
탁남
(대서인태도
온건파)
숙종
숙종초 역모혐의로 실각
경신대출척
: 서인집권후 윤휴,허적 등 남인 주살
4색붕당(1683)
: 남인에 대한 처분 대립
노론(강경파/송시열)
소론(온건파/윤증,남구만)
기사환국
: 남인계 장희빈의 아들
(경종)원자책봉과정에서
남인집권, 서인에 보복
갑술환국
: 서인계 폐비민씨의 복위로 서인집권, 남인에 대보복
경종
신임사화
: 소론집권, 노론탄압
영조
탕평책으로 고루
등용했으나 노론우세
소론강경파가 주도한
이인좌의난(1728)과
나주괘서사건(1755)등
으로 소론의 입장약화
노론
소론
남인
정조
사도세자죽음에 대한 입장으로 시/벽파로 분열
벽파(노론)
영조외척 김귀주
시파(남인+소론,노론)
세자외척 홍봉한
선조때 붕당정치 시작, 현종때 절정, 숙종때부터 변질, 정조때 시/벽파 대립후 19C 세도정치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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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1.02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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