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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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태동
Ⅱ. 춘추오패(春秋五覇)
1. 제 환공(재위 BC 685 ~ BC 643)
2. 진 문공(재위 BC 635 ~ BC 628)
3. 진 목공(재위 BC 660 ~ BC 621)
4. 초 장왕(재위 BC 614 ~ BC 591)
5. 송 양공(재위 BC 650 ~ BC 637)
Ⅲ. 전국칠웅(戰國七雄)
1. 제(齊)
2. 조(趙)
3. 초(楚)
4. 한(韓)
5. 연(燕)
6. 위(魏)
7. 진(秦)
Ⅳ. 춘추전국시대의 종말
Ⅴ. 춘추전국시대의 사회
1. 국군(國君)의 암살과 추방

2. 대부(大夫)와 사(士)의 대두
3. 멸국의 진행

4. 현(縣)의 설치
5. 국내체제의 개혁
6. 도시의 발달과 번영 및 성격
Ⅵ. 제자백가(諸子百家)
1. 공자(孔子)와 그 제자

2. 묵자(墨子)와 거자집단(巨子集團)

3. 현실주의자들
4. 이상(理想)에의 도피
Ⅶ. 춘추전국시대가 중국문화에 끼친 영향

본문내용

시대 병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서는 손무(孫武)와 손빈(孫)을 들 수 있다. 손무는 춘추시대 말 사람으로 제(齊) 출신이다. 그는 오왕 합려 합려(闔廬)(BC 515~BC 496) : 춘추시대의 오(吳)의 왕. 오자서와 손무를 등용하여 오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 춘추오패 중의 하나로 뽑히기도 한다.
에게 군사(軍師)로서 임용되어 초의 수도 점령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병법 이론은 손자(孫子) 13편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손빈도 제 출신으로 맹자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제의 군사로서 위의 군대를 마릉에서 대패시키고 있다. 그의 병법서는 일찍이 실전되었었는데 근년 은작산 한묘에서 발견되어 손빈병법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의 병법은 손무의 병법을 발전시킨 것이다.
순자(荀子)는 전국시대 말기의 유가인데 공자나 맹자와는 대립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맹자와는 달리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으로서 ‘예(禮)’를 중시하였다. 그렇지만 그 ‘예’는 국가의 여러 제도까지 포함한 것이어서, 공자의 ‘예’와는 달리, 오히려 ‘법(法)’에 가까운 것이다. 또한 그는 옛날의 성왕(聖王)을 이상으로 하지 않고 근대의 왕을 규범으로 하는 후왕(後王)사상을 제창하였다. 순자가 살았던 시대는 진(秦)에 의한 천하통일이 누구의 눈에도 구체적 현실로서 분명해지고 있었다. 순자의 사상은 이러한 현실을 토대로 다가올 통일세계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는 점을 시야에 넣어 구상한 사상이었다. 실제로 그의 사상은 후대에 유학의 정치적인 측면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4. 이상(理想)에의 도피
춘추시대로부터 전국시대에 걸친 기간은 전란이 멈춘 적이 없는 극히 혼란한 시대였다. 위에 쓴 유가나 묵가, 법가 등은 혼란에 질서를 세우는 것을 의도하여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현실세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전란과 혼란의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하여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려고 하는 사상가들도 출현했다. 그것이 도가(道家)라 칭해지는 한 무리의 사상가들이다.
도가의 시조로 칭해지는 노자(老子)는 그가 살았던 시대도 불명하여 실재의 인물인가의 여부도 알 수 없다. 그가 저술했다고 하는 노자(老子)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도(道)’사상을 근본으로 한다. 그 ‘도’는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어 취할 수 없는 실재이며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의해서만 감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무위자연’은 또한, 처세술임과 동시에 정치술이기도 하여서, 민에 간섭하지 않는 정치를 최상으로 한다. 그리고 그가 이상으로 하는 국가는 당시 번영하고 있던 대국이 아니라 인구가 적은 자급자족적인 소국이었다.
장자(莊子)는 송(宋) 출신으로 기원전 4세기 후반의 사람이다. 한때 관리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전혀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고, 일생을 은둔자로 지냈다. 장자의 사상은 본질적인 부분에서 노자와 같은 기반에 서 있으나 그 현실세계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다르다. 노자는 아직 현실정치에의 관심이 강하지만 장자는 그러한 관심이 희박하고, 정신적인 내면에의 관심이 강하다. 그는 현실세계로부터의 초극을 정신의 절대적 자유 가운데에서 추구하여 종교적인 해탈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기원전 3세기 후반이 되면 장자와 같이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학파와는 반대로 노자의 사상을 기초로 하여 한층 현실정치에 접근하려는 도가의 한 종파가 출현한다. 이 일파는 황제(黃帝)를 숭배하여 ‘황로(黃老)’학파라 칭해진다. 이 학파의 사상은 세세한 것에는 관여하지 않는 ‘무위청정(無爲淸靜)’의 정치를 이상으로 하고 있는데, 한 초에는 관료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Ⅶ. 춘추전국시대가 중국문화에 끼친 영향
춘추시대 말에는 철제농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으며, 치수관개(治水灌漑) 공사도 각국에서 시행되어 경지면적이 증대하였다. 이렇게 새로 개척된 농지에서의 수확이나 산의 나무, 해변의 소금 ·물고기 등 산물에 대한 과세로써 전국시대의 각국 군주는 권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한편, 소금이나 철(鐵)의 생산 판매업자도 거리(巨利)를 취했으며, 교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쟁기 모양을 본뜬 포전(布錢), 소도(小刀)의 형을 이룬 도전(刀錢) 등 청동제 화폐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은 사회조직에도 변화를 가져와, 이제까지의 씨족 결합이 무너지고 5인 평균가족이 독립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는 자도 나왔으나 한편으로는 광대한 토지를 취득하고 유력한 호족(豪族)을 중심으로 동족이 결집하는 호족도 나타났다. 가문의 배경이 없더라도 본인 자신의 재능 ·자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는 중국 사상사에서도 가장 그 활동이 활발했던 황금시대였다.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공자, 맹자, 순자 등의 유가(儒家)는 효제(孝悌), 인의(仁義), 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묵자를 비조로 하는 묵가(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겸애(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상앙, 한비(韓非)와 같은 법가(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하여 부국강병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한 정치에 기대를 거는 제학파에 대하여,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皆農主義)를 주장하는 농가나, 인위적 정치도덕의 폐기를 주창하는 노자, 장자 등의 도가(道家)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활발하던 사상활동도 진 ·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정통사상의 기준이 나타남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처럼 춘추전국시대는 당시 중국의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면에서 대변혁을 불러일으킨 시대였다. 특히 제자백가의 출현은 중국 사상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유가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상들도 오늘날에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참고>
두산 세계 대백과
사마천의 사기세계(http://giant.x-y.net)
아시아 歷史와 文化 1 역자 : 박건주 도서출판 신서원
  • 가격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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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19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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