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C영국의 대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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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주제 제기의 동기

2. 19C영국의 상황
(1) 19세기 전반 영국의 모습
(2) 19세기 전반 영국의 대외정책
(3) 19세기 후반 영국의 모습
(4) 19세기 후반 영국의 대외정책
(5) 영국의 인도를 향한 식민정책

3. 영국의 동아시아를 향한 대외정책
(1) 對 조선정책
(2)對동남아시아 정책
(3)對일본 정책
(4) 對러시아 정책

4. 對중국정책
(1) 1차 아편전쟁
(2) 2차 아편 전쟁 - 애로우호(號) 전쟁
(3) 영국, 프랑스의 중국침략
(4) 영국, 프랑스의 재침략
(5) 중-영 마가리 사건에 관한 교섭(August Raymond Margary)
(6)영국의 홍콩 강점

5. 結

본문내용

얻어내었고 아울러 통역으로 마가리를 파견하여 운남에서 버마로 들어가 그들을 영접하도록 했다. 1875년 2월 마가리는 탐험대를 이끌고 버마에서 운남으로 들어갔다. 1875년 2월 22일 마가리와 그를 수행하던 중국인 몇 명이 살해당하였고 브라운도 도중에 저지를 당하여 버마국경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소위 마가리 사건은 영국이 침략의도를 가지고 중국서남변경에서 일으킨 사건이었다.
(6)영국의 홍콩 강점
홍콩(香港)은 원래 광동성(廣東省) 신안현(新安縣: 지금의 寶安縣)에 속하며 주강구(珠江口) 연해의 작은 어촌(漁村)이다.
영국은 홍콩을 할양 받은지 10여년 후 청조가 태평천국(太平天國: 南京을 수도, 1853-1864)의 난에 의해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아편무역을 합법화하기 위해 1856년 10월 광주(廣州)의 황포(黃?)에서 청조 관헌이 영국 국기를 걸고 있던 중국인 소유 상선(商船) "애로우호"에 타고 있는 해적(李明太 등)을 체포하자 영국의 광주주재 영사(領事)는 이 배는 영국선이라고 우기며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 프랑스와 공동 출병, 1957년 말 광주를 침략하여 소위 '제2차 아편전쟁'을 발동했다. 1858년 5월 영불 연합군이 천진(天津) 입구의 대고(大沽)의 포대(?臺)를 함락하자, 청조 함풍제(咸豊帝: 재위 1851-1861)는 영국·프랑스와 각각 <天津條約>을 맺었다. 그러나 후에 이를 내심 반대한 청조의 공격에 후퇴 당했던 영불은 다시 1860년 7월 2만여 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9월 천진을 점령, 명(明)·청(淸)간의 번영을 상징했던 북경 근교의 황궁(皇宮) 원명원(圓明園)을 철저히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10월 북경을 함락, 청조를 굴복시켜 각각 <北京條約>을 체결했는데, 영불(英佛)은 이 <北京條約>에서 <天津條約> 일체를 다시 인정받아 천진(天津)을 추가로 개항시키고, 또 영국은 홍콩섬(香港島) 맞은편 '구룡사지방'(九龍司地方: 즉, 현재 九龍半島 남부의 界限街 이남의 영토)을 할양받고, 영불 연합군은 군사비 배상으로 각각 800만 냥을 받기로 결정했다. 한편 러시아는 이 강화(講和)를 중간에서 조정한 대가로 1858년의 <아이흔(楗琿)조약>에 이어 1860년 11월 <北京條約>에 의거 동북지역인 흑룡강(黑龍江) 이북의 영토와 우수리강(烏蘇里江) 이동의 연해주(沿海州) 및 쿠릴열도(사할린)를 포함한 100만㎞²의 광대한 영토를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획득했고, 이후 19C말까지 서북지역의 51만 Km2를 또 획득해 갔다. 그 외에도 중국은 상해(上海)로부터 서쪽으로 양자강(장강) 상류까지의 주변 일대는 영국의 세력 하에, 대만과 복건성 및 만주와 한반도는 일본 지배 하에, 산동(山東) 일대는 독일의 세력 하에, 만주 위쪽과 외몽고·내몽고 일대의 긴 북쪽지역은 러시아의 세력 하에, 그리고 남쪽 광동(廣東)·광서(廣西)·해남도(海南島)·곤명(昆明) 일대는 프랑스의 세력 하에 각각 배타적으로 편입되었다.
게다가 1895년 청(淸)이 중일(中日)전쟁 패전이후 열강이 다투어 중국에게 '조차'를 요구할 때, 영국은 1898년 6월 9일 다시 홍콩 부근을 광동(廣東)일대의 프랑스 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구실 하에 북경에서 중·영<전척향항계지전조>(展拓香港界址專條)란 것을 체결하여 지금 심천(深朮) 이남의 신안현(新安縣)의 심천하(深朮河) 이남과 구룡반도(九龍半島) 계한가(界限街)의 이북지구의 넓은 지역과 이 부근에 속한 235개 도서(島嶼)를 99년간 조차(租借)해 갔다. 후에 이 중국대륙과 연결된 지역을 '신계'(新界) 즉, '새로운 영토'라는 뜻으로 칭해지게 되었는데, '신계'의 빌리는 기간은 1997년 6월까지로 했다. 위의 모든 할양받은 지역과 빌린 지역을 합쳐 간단히 '홍콩'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신계' 지역은 홍콩 전체 면적의 92%를 점할 정도로 크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댓가로 어떤 보상도 받은 바 없다. 이처럼 힘없는 중국은 완전히 제국주의 열강의 반식민지(半植民地) 상태에 떨어지게 되고 열강은 엄청난 이익을 중국을 포함해 전 세계로부터 탈취해 간 것이다. 지금까지 영국이 중국으로부터 빼앗아간 영토를 다시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홍콩의 총면적은 1,076km²
① 1842년 8월 <남경조약>: 홍콩섬(香港島: 인근 작은 섬 포함) 할양: 79.77km²
② 1860년 10월 <북경조약>: 구룡반도(九龍半島) 남단(인근의 작은 섬과 船洲 포함) 할양: 11.7km²
③ 1898년 6월 <전척향항계지전조>: 신계(新界: 본토와 235개의 크고 작은 섬 포함) 99년간 조차: 984.53km²(홍콩 전체 면적의 92%): 235개 섬 중에는 대서산도(大嶼山島), 청의도(靑衣島), 남아도(南?島) 등 큰 섬이 포함된다.
그 외, 현재 홍콩인구는 630만명(1997년)이고, 이중 중국인이 98%, 영국인은 2만여명이다.
5. 結
영국의 식민대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아시아에게로의 정책과 인도로의 정책은 확연히 다른 것이 사실이다. 우선 인도로의 영국의 대외정책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듯이 인도인들과의 이질감을 줄이기 위하여 현지의 사회 및 생활 풍습은 물론 언어까지 습득하며 영국의 자랑거리인 민주적 정치이념제도를 전파하는데에도 주력했다. 그러나 중국으로의 대외정책으로는 그들의 풍습은커녕 언어, 정치이념을 전파하는데도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무역정책에서의 상당한 이익부문에만 주력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인도와 달리 중국에서는 많은 유혈전이 일어났으며 극보수적이었던 중국사회에 피부색이 다른 인종의 출현조차 괴리감이 느껴질 때인데 이러한 이질감을 좁히는 노력없이 오직 무역이익만 챙기는데 급급한 영국의 19세기 초중반의 대외정책은 약간의 오판이 아니였나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영국의 아시아 대륙에 상륙한 그 순간부터 영국은 포함외교를 시행했다. 즉 순차적 개방요구를 원한 것이 아니라 강압적인, 당시 영국의 지배논리인 약육강식의 논리로써 유교사상이 강하고 예(禮)를 중시하는 중국에 무력과 함께 상륙했던 것이 오히려 중국인 뿐 아니라 아시아인에게 큰 이질감을 형성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 조별 토론의 결과로 생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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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21
  • 저작시기20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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