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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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명 의 희생을 내고, 그리고 회룡총 15자루, 조총 2백자루와 그 외 무수한 탄약·죽창 등의 물건을 버렸다.
그 밖의 전투
농민군 본대가 해산하고 있을 무렵, 전라도 남해안 일대에 있던 농민군은 12월 5일 장흥을 전령하고 부사이하 관속들을 처단하였으며 12월 10밤에는 강진병영을 습격, 함락시켰다. 장흥·강진 지방의 농민군이 강력하게 버티어 나가자 관군과 일본군은 12월 10일부터 이곳으로 총공세를 감행했다. 이곳의 농민군은 장흥에서 정부군과 맞닥뜨려 끝까지 싸우다 해산하였다. 그 외에도 12월 12일 영동 용산장터에서는 토벌 나온 관군을 농민군이 공격하여 청주로 쫓아버렸다. 황해도지방에서의 마지막 전투는 11월 27일 해주 교외에서 벌어졌다. 해주성의 관군과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해 농민군은 맹렬한 공격을 펼쳤으나 당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이밖에도 경상도·강원도 각 지방에서 농민군이 지방관아를 점령하는 등의 활약을 하였으나 정부·일본 연합군의 반격을 당하여 농민군들은 12월을 고비로 해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894년의 농민 전쟁은 막을 내렸다 그 후 호남일대는 좌선봉장 이규태 및 우선봉장 이두황이 거느리는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무자비한 소탕작전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농민전쟁을 진압한다는 구실 아래 농민군은 물론 무고한 양민까지 닥치는 대로 체포, 학살하였으며, 심지어 부녀자를 능욕하거나 마을을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다. 농민전쟁 기간동안 쌓아올린 새로운 사회로의 사회·경제적 기반, 이를테면 근대 민족사회를 여는 조건들이 정부·일본 연합군의 학살·파괴로 좌절되어 갔다
.
농민전쟁의 성격과 의의
농민전쟁의 주체세력과 성격
주체 세력은 크게 주도 세력과 기본 동력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주도세력은 전봉준으로 대변되는 호남의 진보적 지식인으로 잡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농민 전쟁의 기본 동력은 조선후기에 분화과정에서 형성된 그리고 19세기 이후 짧게는 개항 이후 일어난 농민 항쟁을 통해 결집된 소빈농층이었고 이들은 1·2차 농민 전쟁과정에서 탐관오리·지주 토호세력·부농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주체세력의 사회·경제적 지향은 농민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안정적 토대확보와 나아가 소상품 생산자로 성장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이에 장애 되는 사회적 제약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탐학관리의 축출, 외국인들의 상행위를 금지하는 것과 부당한 신분차별의 철폐와 지주 토호들의 무단을 제거하는 데 투쟁목표를 두었다. 주체세력의 정치·이념적 지향은 반봉건적 민중사상의 토양 속에서 출발하여 척왜양 운동기에는 초보적 반외세 의식과 민회라는 서구 정치제도에 대한 인식까지 보이다가 1차 기병을 거쳐 집강소 농민통치 및 청일전쟁을 경험하고서는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국내외문제와 2차기병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결국 그것은 2차기병의 목적이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데 있고 또 농민군 스스로 의병이라고 부르는 데서 나타나듯이 궁극적으로 봉건체제를 지양하고 자본주의적 발전과 궤를 같이하는 근대민족주의로의 지향에 있었다. 구체적으로 1차기병에서 집강소 통치기간에 폐정개혁 실시와 김학진과 같은 중앙관리를 포섭한 데서, 2차기병에서 반일 대연합 전선을 구축하려한 데서 그 단계적 발전과정이 추적된다.
그러나 이들이 완전히 근왕적 사고를 탈각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전국 농민군간의 보다 견고한 지역·조직적 결속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또한 일본의 경복궁 침입으로 인해 위로부터의 개혁을 담당할 세력과의 제휴가 차단된 상태에서 농민전쟁을 치렀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적할 수 있다
농민전쟁의 의의
1894년 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은 주·객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패배하고 말았으나 역사 속에서도 패배한 것은 아니었으며 한국근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첫째, 1894년 농민전쟁은 중세사회의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둘째는 조선 후기이래 진행되어온 반봉건 농민항쟁의 총결산이자 근대 민중항쟁의 출발점으로서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셋째는 외세의 침략에 대한 극복을 위해 투쟁하였던 반침략 반외세 투쟁의 선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수많은 농민들의 참여와 희생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만 농민전쟁의 패배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외세의 간섭을 들 수 있다. 1차 봉기 때는 외세의 개입에 의해 중동에서 중단되었으며, 그 목적 자체가 외세의 축출이었지만 끝내는 그 외세에 의해 진압 당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둘째는 개화파가 농민군을 적대세력으로 간주하여 진압에 나선 것이었으며, 셋째는 농민군축의 주체적인 측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농민군축의 이념상의 미숙성, 통일적인 지휘체계와 조직력의 미흡, 농민군의 전략 전술상의 미숙함, 무기의 열세 등이 그것이다. 그밖에도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에도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894년의 농민전쟁은 봉건적인 중세사회를 마무리짓기 위한 총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고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이후 일본에 의한 보호국화가 강제되었을 때 이에 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반일투쟁으로 면면히 이어지면서 반일의병전쟁의 선구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마지막으로 동학은 경상도지방에서 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지방을 주축으로 봉기되었던 것일까? 이는 전라도가 삼남지방에서도 가장 중요한 곡창으로 탐관오리들이 군침을 흘리는 곳이었기에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균전사나 전운사 같은 새로운 직역이 생겼고 그들의 수탈은 악랄하기 짝이 없었다. 또한 개국과 동시에 밀려든 제국주의 상품은 조선의 농촌 사회를 구조적으로 붕괴(崩壞)시켜갔으며 특히 일본의 곡물 수탈은 이 지방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데다가 신라의 삼국 통일이후부터 차별대우를 받기 시작한 이 지방은 지역감정이 축적되어왔다. 결과적으로 전남지방의 농민항쟁은 작인의 봉건 지주에 대한 계급투쟁을 기저로 하여 조세수취를 둘러싼 국가의 수탈, 관속의 탐학및 서원, 궁방, 사대부들의 향촌에 대한 무단지배에 대항하여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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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12.23
  • 저작시기2004.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8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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