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로마와 한의 상호 이해
2. 로마와 한의 교역
3. 헬레니즘과 동서교류
4. 비단의 서전
2. 로마와 한의 교역
3. 헬레니즘과 동서교류
4. 비단의 서전
본문내용
늦어도 6세기초 이전) 질 좋은 비단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후에 명대에 이르러서는 페르시아의 고급 비단 기환이 그 섬세함이나 짜임새에서 원산지 중국을 능가하였다고 함. 이와같이 중국비단의 대서방 교역의 중계자 역할을 하였을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술을 받아들인 후 그것을 진일보 발전시켜 질 좋은 견직품을 외국에 수출하면서 견직업의 발전에 기여함
④ 로마로의 전파 : 기원전 5세경에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처음 비단 전달자는 월지인들이다. 월지는 옥 문화가 발달한 곳으로 옥을 중국에 수출하고 그 대가로 중국비단을 받아 서방에 중개수출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흉노다. 흉노는 한으로부터 매해 다량의 중견을 공물로 받았는데 이를 전부 자체 소모하지 않고 서방과의 교역품으로 충당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비단은 비싼 운반비는 물론이고 경유국마다 부과하는 세금까지 해서 로마 현지에서는 금과 같은 고가의 진품이었다. 로마인들의 비단에 대한 인기는 여러 고전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비단을 다량으로 소모한 로마인들은 일찍부터 비단 생산의 비밀을 탐지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페르시아의 중간 차단과 중국인들이 비단 유출을 통제한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6세기경에 비밀리에 누에고치를 반입해 옴으로써 그토록 희구하던 자체의 양잠 직견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선사시대 중국에서 발생한 양잠법은 각이한 방법과 루트를 통해서 2~3세기경 실크로드 남도 주변 국가, 3세기 말 서북 인도와 카슈미르에, 4~5세기 경에는 페르시아와 시리아에, 끝으로 6세기 중엽에는 비잔틴에 각각 전파되었다.
비단의 서전 루트
고대 비단 유물이 출토된 주요 유지
① 에치나 강 유역 유지: 현 중국 내몽골 자치구
② 누란 유지: 누란 왕국의 도성 쿠로리아나
③ 니야 유지: 니야 유지 북방 사막
④ 노인 울라 유지: 울란바토르 북쪽
⑤ 오글락티 유지: 남러시아 미누신스크 북방 북예니세이 강우안
⑥ 케르츠 유지: 흑해 북안의 크리미아 반도
⑦ 켄콜 유지: 중앙아시아 키르키스공화국 탈라스 강안의 툴로촌
⑧ 말미라 유지: 시리아
⑨ 가욕관 유지: 감숙성 가욕관
⑩ 무위현 마저자 유지: 감숙성 무위현
이렇게 한금이나 당금 유물은 장안을 중심으로 동은 한반도의 낙랑에서 서는 시리아의 팔미라까지, 북은 잘라이노르로부터 남은 장사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의 광활한 지역에서 두루 출토됨으로써 고대 중국 비단의 종횡무진한 전파상을 확인 할 수 있음.
이 발굴 유지들을 연결하면 바로 비단의 서전 루트가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루트는 세칭 비단길(실크로드)의 주로와 대체로 일치한다.
역사가 3천~4천 년을 헤아리는 이 진품이 인류의 물질 생활 향상과 문명교류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다. 사실상 중국의 4대 발명품보다도 더 유구하고 더 위대한 발명품인 것이다. 한 대에 이르러는 각이한 통로로 서역을 비롯한 서방으로 다량 유출되면서 서방에서 ‘비단이 곧 중국’ ‘중국이 곧 비단’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리만큼 비단과 중국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 중국 비단의 서전은 어디까지나 공사간 증여나 교역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교류사적 차원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원래 전파 문명이란 전파 자체에 튼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피전파지 문명과 융합되어 토착화되었을 때 비로소 문명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법이다.
비단의 토착화는 필연코 양잠의 선행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러한 요청에 중국공주와 경교 사제들이 각각 1~2세기와 6세기 우기(호탄)와 로마에로의 잠종 밀반을 단행하였고 이를 계기로 명실상부한 비단의 서전이 이루어졌다.
④ 로마로의 전파 : 기원전 5세경에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처음 비단 전달자는 월지인들이다. 월지는 옥 문화가 발달한 곳으로 옥을 중국에 수출하고 그 대가로 중국비단을 받아 서방에 중개수출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흉노다. 흉노는 한으로부터 매해 다량의 중견을 공물로 받았는데 이를 전부 자체 소모하지 않고 서방과의 교역품으로 충당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비단은 비싼 운반비는 물론이고 경유국마다 부과하는 세금까지 해서 로마 현지에서는 금과 같은 고가의 진품이었다. 로마인들의 비단에 대한 인기는 여러 고전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렇게 비단을 다량으로 소모한 로마인들은 일찍부터 비단 생산의 비밀을 탐지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페르시아의 중간 차단과 중국인들이 비단 유출을 통제한 까닭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 6세기경에 비밀리에 누에고치를 반입해 옴으로써 그토록 희구하던 자체의 양잠 직견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선사시대 중국에서 발생한 양잠법은 각이한 방법과 루트를 통해서 2~3세기경 실크로드 남도 주변 국가, 3세기 말 서북 인도와 카슈미르에, 4~5세기 경에는 페르시아와 시리아에, 끝으로 6세기 중엽에는 비잔틴에 각각 전파되었다.
비단의 서전 루트
고대 비단 유물이 출토된 주요 유지
① 에치나 강 유역 유지: 현 중국 내몽골 자치구
② 누란 유지: 누란 왕국의 도성 쿠로리아나
③ 니야 유지: 니야 유지 북방 사막
④ 노인 울라 유지: 울란바토르 북쪽
⑤ 오글락티 유지: 남러시아 미누신스크 북방 북예니세이 강우안
⑥ 케르츠 유지: 흑해 북안의 크리미아 반도
⑦ 켄콜 유지: 중앙아시아 키르키스공화국 탈라스 강안의 툴로촌
⑧ 말미라 유지: 시리아
⑨ 가욕관 유지: 감숙성 가욕관
⑩ 무위현 마저자 유지: 감숙성 무위현
이렇게 한금이나 당금 유물은 장안을 중심으로 동은 한반도의 낙랑에서 서는 시리아의 팔미라까지, 북은 잘라이노르로부터 남은 장사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의 광활한 지역에서 두루 출토됨으로써 고대 중국 비단의 종횡무진한 전파상을 확인 할 수 있음.
이 발굴 유지들을 연결하면 바로 비단의 서전 루트가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루트는 세칭 비단길(실크로드)의 주로와 대체로 일치한다.
역사가 3천~4천 년을 헤아리는 이 진품이 인류의 물질 생활 향상과 문명교류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다. 사실상 중국의 4대 발명품보다도 더 유구하고 더 위대한 발명품인 것이다. 한 대에 이르러는 각이한 통로로 서역을 비롯한 서방으로 다량 유출되면서 서방에서 ‘비단이 곧 중국’ ‘중국이 곧 비단’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리만큼 비단과 중국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 중국 비단의 서전은 어디까지나 공사간 증여나 교역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교류사적 차원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원래 전파 문명이란 전파 자체에 튼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피전파지 문명과 융합되어 토착화되었을 때 비로소 문명적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법이다.
비단의 토착화는 필연코 양잠의 선행을 요청하고 있었다. 이러한 요청에 중국공주와 경교 사제들이 각각 1~2세기와 6세기 우기(호탄)와 로마에로의 잠종 밀반을 단행하였고 이를 계기로 명실상부한 비단의 서전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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