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저자
2. 수신자
3. 기록 연대와 장소
4. 기록 목적
5. 본 서신의 특징
6. 본 서신의 의의
7. 전체개관
8. 각 장 내용
2. 수신자
3. 기록 연대와 장소
4. 기록 목적
5. 본 서신의 특징
6. 본 서신의 의의
7. 전체개관
8. 각 장 내용
본문내용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들어오게 되면 우리에게는 ‘자유’를 지킬 책임이 주어진다. 우리 안에서 심각한 갈등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간에 심한 갈등이 생겨난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적에는 그런 갈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에는 성령님께서 내주(內住)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자신의 인도에 따르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전처럼 내 마음대로 해보고 싶은 소욕(=육체의 소욕)과 성령님의 인도함에 따르려는 신앙인다운 소욕(=성령의 소욕)간의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이 두 소욕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고, 어느 누구도 우리의 선택을 간섭할 수 없다. 정말 우리는 아무런 구속이나 제한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선택의 결과는 정반대이다. 전자를 선택하면 우리는 다시 이전에 행하던 육체의 노예 역할을 하게 되고, 후자를 택하면 참 자유인으로서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진정한 자유인이라면 후자를 택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분을 좇아가는 일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특별한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며 그러기에 그분을 좇아 행하라는 명령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능한 일을 실현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명심해야 할 사실이 하나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6장
본장의 앞부분은, 믿는 자가 성령님을 좇아 걸으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면 그의 실생활에서 어떤 결과를 낳아야 하는 것인지를 잘 알려 주고 있다. 그 실제적 결과 중 하나는, 믿는 자들 상호간의 관계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은 성령님을 좇아 걷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성령의 열매 중 첫번으로 언급된 ‘사랑’은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이라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인 “서로 사랑하라”가 좀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님에 의한 새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의 삶’이다. 그리고 이 삶은 무엇보다도 믿는 자들 사이에서 진하고 풍성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삶은 믿는 자들안에서 머물러 있는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믿는 이들은 사랑을 힘써 행해야 하는데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거짓 가르침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현혹시켜서 그들로 할례를 받게 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실제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29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가리켜 또다른 구약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일관되게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장
본장의 앞부분은, 믿는 자가 성령님을 좇아 걸으므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면 그의 실생활에서 어떤 결과를 낳아야 하는 것인지를 잘 알려 주고 있다. 그 실제적 결과 중 하나는, 믿는 자들 상호간의 관계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은 성령님을 좇아 걷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성령의 열매 중 첫번으로 언급된 ‘사랑’은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이라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율법인 “서로 사랑하라”가 좀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님에 의한 새 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의 삶’이다. 그리고 이 삶은 무엇보다도 믿는 자들 사이에서 진하고 풍성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삶은 믿는 자들안에서 머물러 있는 삶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믿는 이들은 사랑을 힘써 행해야 하는데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거짓 가르침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현혹시켜서 그들로 할례를 받게 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실제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29에서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가리켜 또다른 구약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일관되게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