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비애`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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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이름을 일본이름으로 바꾸는 이른바 창씨개명을 통하여 가야마미쓰오(향산광랑, 香山光郞)로 바꾸었다.
또한 대동아 문학자 대회에 1944년 11월 참가하여 다른 식민지 작가에 뒤질세라 맹활약을 했다. 그리고 학병권유의 글과 연설을 번갈아 했는데 도쿄에서 최남선과 함께 한 권유연설에 얽힌 뒷이야기는 춘원의 신념에 찬 출정의지를 말해준다.
1945년 8월 15일 경기도 사능에서 춘원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며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으나 서울로부터 친일파 처단이라는 불길한 소식이 전해온다. 피신을 권유하는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머물며 [나의 고백], [돌베개]를 비롯한 몇몇 글을 썼는데 그 주조는 "나는 민족을 위하여 살고 민족을 위하다가 죽은 이광수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춘원이 반민특위에 체포당해 투옥된 것은 1949년 2월 7일 효자동 자택에서였다. 그러나 아들의 혈서가 담긴 탄원서와 건강의 악화로 그는 3월 4일 출옥하게 되고, 그의 작품은 그대로 한국에 전해지게 되었다.
춘원은 1950년 7월 북한 당국에 연행된 뒤 1950년 자강도 강계군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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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4페이지
  • 등록일2005.04.22
  • 저작시기2005.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4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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