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부통합 후 조선혁명군과 조선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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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부통합 후 조선혁명군과 조선독립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참의부의 성립과 활동
(1)참의부의 성립
(2)참의부의 항일전

2. 정의부의 성립과 활동
(1)정의부의 성립
(2)정의부의 항일전

3. 신민부의 성립과 활동
(1)신민부의 성립
(2)신민부의 항일전

4. 삼부통합운동

5. 조선혁명군의 조직과 활동
(1)조선혁명군의 조직
(2)조선혁명군의 항일전

6.한국독립군의 조직과 활동
(1)한국독립군의 조직
(2)한국독립군의 항일전

본문내용

최중산 김상덕 조각산
부관: 최만취 이규보 한해강
제1대대장: 오광선 제2대대장: 최악
제3대대장: 전북민 제4대대장: 한무빈
제5대대장: 안종명 제6대대장: 권오진
제4포병대장: 지상기 별동대장: 심만호
산악향도대장: 허경삼 군의감: 강진해
(2)한국독립군의 항일전
1932년 이사 정초 등이 이끄는 길림성위군과 호로군, 왕덕림의 길림구원군, 고봉림 오의성 자세영 등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33년 말까지 2년여 동안 한국독립군은 쌍성보전투 경박호전투 사도하자전투 동경성전투 등 일본군 73연대인 판총연대를 거의 섬멸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33년 말에 들어 한국독립군은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1933년 10월 13일 중국의 오의성부대와 연합하여 작전을 준비하던 중 오의성부대가 한국독립군 총사령부를 기습 포위하고, 총사령 이청천 이하 330여 명의 한국독립군을 체포 구금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대전자령전투에서 노획한 무기를 연합한 중국의 자세영부대와 분배하는 과정에서 대립도 한 원인이 되었지만, 중국공산당의 밀령을 받고 파견된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 서기인 주보중이 오의성부대의 참모로 있으면서 한국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한 것이었다. 오의성이 주보중의 음모임을 알고 10월 하순 한국독립군 간부들을 모두 석방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상당수의 세력이 흩어졌고, 한국독립군은 존립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곤경에 처해있을 때, 김구로부터 관입이동에 대한 제의가 전달되었다. 김구는 장개석의 협조를 얻어 낙양군관학교에서 이청천을 교관양성 책임자로 하고 한국독립군을 비롯한 만주지역 한인청년들의 입교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독립군의 중국관내 이동이 결행되었다. 총사령 이청천을 비롯하여 오광선 이복원 공진원 등 한국독립군 간부와 군관학교 입학지원자를 포함하여 39명이 남경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와함께 한국독립당도 중앙집행위원장 홍진을 중심으로 하여 관내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동북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군의 주요세력이 중국관내로 이동하게 되었다.
남경으로 이동해 온 후 , 총사령 이청천을 비롯한 오광선 조격한 등은 교관으로, 군관학교 입교지원자는 학생으로 낙양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1934년 3월 남경의 한국혁명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이들은 1935년 7월 5개 정당단체가 통일하여 결성한 민족혁명당의 구성원이 되었다가, 1937년 4월 만주의 조선혁명당 계열과 함께 탈당하여 남경에서 만주의 그것을 재건하는 형식으로 조선혁명당을 새로이 조직하기도 했다.
만주 세력이 결합한 조선혁명당은 중일전쟁 발발 직후 김구의 한국국민당측과 연합,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을 계획, 수립하면서 광복군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광복군의 핵심간부로 역할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윤병석 외 5인, 중국동북지역 한국독립운동사, 집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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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5.05.08
  • 저작시기2005.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6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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