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좌우 합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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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민족통일 전선운동의 과정

3. 1940년대 전반기
좌우 합작운동의 과정

4.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의 좌우합작

5. 맺음말

6. 참고문헌

본문내용

우익 진영이 공동의 의견을 갖지 못한 채, 한국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끝내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후 좌 우익의 중도계라 할 수 있는 김규식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1946년 10월 좌우합작을 추진하기 위한 기구로 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가 구성되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우합작 7원칙’ 등 좌우세력이 공동으로 추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갔다. 그러다 1947년 7월 이를 주도하던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1948년 분단정권 수립이 추진되는 가운데 남북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노력으로 남북협상이 전개되었다.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후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면서, 분단정권 수립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유엔에서 파견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38선 이북의 입국이 불허되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과 김구가 주도하여 1948년 2월 4일 북측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4월 19일부터 남북의 56개 정당과 단체의 대표들이 처음으로 자리를 함께 하였고, 여기서 ‘미소 양군의 즉시 철수’와 ‘통일적 민주정부 수립’을 주요 내용으로 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와 관계없이 남한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계열 한국독립당과 국민의회의 대부분이 김구를 따라 불참한 가운데 510선거가 실시되었고, 198석의 의원의 대부분이 반(反) 김구 측에서 차지하게 되어 김구의 정치적 활동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개원되고, 8월 16일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도 끝나게 되었고 북한에도 단독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통일정부 수립은 완전히 좌절되었다.
5. 맺음말
일제 식민지 시대의 우리 민족은 일치단결하여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은 우리 민족 스스로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보여준 거족적 물결이었다. 이 31운동의 이념 아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중국에서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 공산주의 세력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좌 우 세력은 여러 차례에 걸쳐 양 진영을 합작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1920년대의 ‘민족유일당운동’, 1930년대 초반의 ‘민족혁명당의 결성’, 1939년 기강에서의 ‘7당 및 5당 통일회의’, 1940년대 전반기의 ‘통일전선운동’이 그것이다.
1920년대는 유일당운동으로 대표된다. 유일당운동이란 민족 대 단결체로서의 당(黨)을 조직하자는 것으로 중국 각지에 촉성회가 조직되는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북경, 상해, 광동, 무한, 남경의 촉성회가 연합하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연합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1929년 19월 좌익 측의 주도로 촉성회는 해체되고 민족유일당운동은 결렬되었다.
1930년대 초반에는 독립운동의 정당 단체들의 통일이 추진되면서 또 다시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었다. 임정을 옹호 유지하고 있던 한국독립당을 비롯하여 조선의열단 한국혁명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의 대표들이 참가,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1939년 기강에서도 다시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독립운동전선은 우익진영의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과 좌익진영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청년전위동맹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양 진영은 단일당을 조직하기 위해 ‘7당 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고 민족전선이 탈퇴하였다.
1942년에는 우익진영인 광복진선이 3당을 통일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좌익진영은 무장조직인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진출하면서 와해되었다. 그리하여 1944년 4월 제38차 의정원회의에서 김구는 주석이 되고 김규식은 부주석이 되었다. 그리고 좌우 각 정당에서 국무위원을 선출하여 통일전선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1920년대와 30년대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1940년대 전반기의 민족통일전선이 어떻게 형성되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합작이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았다. 좌 우익이 합작을 이룬 후 임시정부는 무장독립군을 결성하여 영국 미국과 공동작전을 추진하였다. 광복군이 국내에 진입하여 일본의 주요시설을 파괴하고 미국이 국내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려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제의 항복이 예상외로 빨리 이루어져 실행하지 못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전후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1940년대 전반기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은 과거 이루어졌던 운동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좌 우 진영의 1940년대 합작은 중일 전쟁과 세계 제2차대전을 인식하면서, 민족전선통일의 필요성을 알고 좌우익 단체들이 임시정부 아래 하나가 되어 통일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즉, 이 시기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은 좌우익이 통일을 이뤄 해방을 맞을 때까지 독립활동을 전개했다는 자체에 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 참 고 문 헌 >
1. 안준섭,「대한민국임시정부하의 후기좌우합작」,『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1, 1986년.
2. 정학섭,「일제하 해외 민족운동의 左右합작과 三均主義」,『한국사회사연구회논문집』1, 1986년.
3. 趙凡來,「韓國獨立黨硏究(1929~1945)」,『한국민족운동사연구』2, 1988년.
4. 노경채,「한국독립당의 결성과 그 변천(1930~1945)」,『역사와 현실』1,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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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金喜坤 외,『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우합작운동』, 한울아카데미, 1995년.
8. 金喜坤 외,『中國關內 韓國獨立運動團體硏究』, 지식산업사, 1995년.
9. 秋憲樹,『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위상』, 연세대출판부, 1995년.
10. 한국근현대사연구회,『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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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6.06
  • 저작시기2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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