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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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종교개혁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제 1 장 종교개혁의 요인

제 2 장 독일의 종교개혁

제 3 장 루터

제 4 장 스위스의 종교개혁

제 5 장 제네바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제 6 장 칼 빈

제 7 장 영국의 종교개혁

제 8 장 과격파 종교개혁
제 9 장 로마 카톨릭의 반동
제 10 장 마치며

본문내용

의 핵심인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전략시킴으로서 초대교회의 에비온주의를 다시 등장시킨 이단들 이었다. 다만 이들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도덕적인 윤리관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기독교라고 부를 수 없고 다만 기독교를 빙자한 도덕주의자들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제 9 장 로마 카톨릭의 반동
종교개혁은 단순하게 신앙적인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온통 뒤바꾸어버린 분기점이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이 로마교황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었으며 ,예술에 있어서도 인문주의와 더불어서 신앙적인 주제를 떠나서 인간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과학에 있어서도 신앙적인 면에서 벗어나서 합리적인 요구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종교개혁은 각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해줌으로서 교황청의 재정적 압박과 더불어서 권위를 상실케 하였다. 교황청으로서는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해야만 했다. 이러한 절대적인 필요성에서 로마 카톨릭의 신학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트렌트회의를 개최 하였으며,새롭게 조직된 예수회라는 종단의 창설을 허락 하였다.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은 이 두 가지대안으로 해서 종교개혁을 능동적으로 대처하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움츠려들었다. 그리고 방어적인 태도로 바뀌었다. 결국 가톨릭은 자유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1869년-1870년의 바티칸 제 1 차 회의에서 더욱더 보호망을 강하게 하였다가 1962년 -1965년의 바티칸 제 2차 회의에서 보호막을 벗어 버리고 개방을 허락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도전장을 던졌다고 말할 수 있다.
1.예수회의 창설과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피레네 산맥에 접한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일찍부터 군대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의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그는 성경과 여러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꿈을 끼웠다. 그리고 영성훈련과 운둔생활, 고행, 대학에서의 공부, 신학공부를 하였다. 1541년 4월14일 예수회는 이그나티우스를 공식적인 대표자로 선출하고 4월22일 새로운 교단으로 출발 하였다. 예수회의 창설 목적은 분명했다. 헌장에서 밝히는대로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실추된 교황의 절대권 회복을 위해서 싸우는 군대교단이 될 것과 해양개척으로 인해서 발견된 신대륙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교단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붙인다면 학문을 발달시킴으로서 선교의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대적인 절대복종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 되었다. 예수회는 그 설립목적과 부합되게 전 세계에 선교활동을 펴 나갔다. 그러나 예수회는 설립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선교에 있어서는 선교 현지의 사상과 너무나도 급속도로 동화되었으며, 신학적으로는 자유의지와 은총론에 있어서 정통신앙과 신학에서 종종 벗어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1773년에 교황 클레멘트14세가 예수회의 활동을 전면적으로 중단할 것을 선포 하였다. 그러다가 1814년 예수회는 교황 피우스 7세에 의해서 복권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설립에는 정치적인 요소도 많이 작용하였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이들의 선교는 지나친 토착화로 인하여 복음의 왜곡을 가져 오기도 했다.
2.트렌트 회의
트렌트 회의의 목적은 이단들이 점차적으로 강성해 가는 것과 교회내부의 부패상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주교들의 태만으로부터 야기 되었다고 밝히며 새로운 각성을 촉구 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교회의 증가하는 부패는 영적 이상의 상실, 교리문제에 관한 신학적인 불명확성, 그리고 종교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었다. 따라서 제7차와 제14차 회의에서 교회개혁에 관한 중요 안건으로는 교회의 무는 ,성직자 중임제, 그리고 감독의 소홀 등 이었다. 교리문제에 있어서는 불가타판 성경을 정경으로 재확인 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는 의인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의인론에 있어서도 종교개혁을 대항하는 새로운 의인론을 제시하는 것이아니라 종래의 의인론을 재확인하는데 불과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회의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꼴불견 회의에 불과 했다.
3.종교재판
중세에 유행한 종교재판이 16세기에 신교박멸의 수단으로 부활된 것이다. 고문으로 강요한 고백이 읽어진 후 정죄되면 세속 정권에 의하여 형이 집행되었다. 재산 몰수, 투옥, 유배 및 사형 등의 형이 내려졌다. 바울 4 세 6명의 추기경을 종교재판의 대법관으로 임명하고 전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탄압의 기수로 삼았다. 그들은 교회의 순결을 구실 삼아 이단의 엄벌을 정당화시키려 했다.1542년에 이태리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종교재판의 형틀에 수없는 개혁자들이 처형됐다.
제 10 장 마치며
초대교회가 신약의 표준에서 탈선될 때마다 새로운 개혁운동이 일어났고 교회는 신약교회적 면모를 새롭게 갖추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이런 개혁운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1517년을 계기로 일어난 북유럽의 종교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16세기의 종교개혁은 루터나 칼빈 만의 운동은 아니었다. 종교개혁 이전부터 교황의 무오설을 비롯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탈선된 교리에 대하여 누누히 지적해오던 선구자들의 터 위에서 계속된 것이다. 이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위크, 후쓰를 위시한 신학적 도전은 중세교회의 기초에 균열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신비주의 개혁자들의 집단적 운동은 점차 하나의 범시민 운동으로 번져서 중세교회의 단일체제에 커다란 위협을 주었다. 거기에다 교회의 위신은 교황청의 분열로 땅에 떨어졌으며, 교황청의 지나친 과세 및 면죄부 판매는 일반 시민의 원망을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부조리는 16세기 유럽대륙 중에서 독일의 경우가 제일 심했다. 또한 독일은 연방제이므로 교황의 세력이 왕권을 통하여 직접 미치기가 힘들었으며, 르네상스를 통한 인문주의의 영향이 지성인들 사이에 컸기 때문에 어느 곳보다도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늘날 루터의 개혁운동을 보다 폭넓은 동기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종교적 관심에서 출발했던 교회개혁운동으로만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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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23
  • 저작시기2005.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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