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 생애와 사상 - 위국충전과 임진왜란 극복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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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충무공 이순신 장군] 생애와 사상 - 위국충전과 임진왜란 극복을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가계와 성장과정
2. 무과급제와 파란의 무관역정
3. 충무공의 왜란극복전략
4. 임진왜란 발발과 부산 함락
5. 충무공 함대의 제1차 출전
6. 민간의 사기충천과 의병 궐기
7. 충무공함대의 제2차 출전
8. 3도수군 연합함대의 제1차 출전
9. 3도수군 연합함대의 제2차 출전
10. 3도수군 연합함대의 제3차 출전
11. 부산진포 해전 쾌승과 제해권 장악
12. 명나라, 조선연합군 평양수복
13. 3도수군 연합함대의 계사년 제1차 출전
14. 3도수군 연합함대의 계사년 제2차 출전
15. 장문포작전과 충무공 제거음모
16. 원균의 대패와 3도수군 몰살
17. 정유재란 발발
18. 충무공 통제사로 재기용
19. 울돌목대첩
20. 충무공 최후의 관음포 대첩
21. 충무공의 위국충정과 살신성인

본문내용

는 혈전을 반복하다가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의 배가 습격되어 자룡이 살해되고 배가 불탔다. 3도수군은 적선이 불타는 것으로 알고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더욱 높였다. 적장 3명이 3층 배에 앉아서 날카롭게 지휘할 때 한명의 적장을 충무공이 격살하니 적들은 명수군의 포위를 풀어 진도독을 구제할 수 있었다.
(1) 충무공의 전사와 관음포 해전
호준포(虎 砲)를 발사하여 연이어 적선을 분쇄하던 중 충무공은 적의 총탄이 가슴에 관통되어 측근들이 부축하여 장막속으로 옮겨지자 충무공은 당부하기를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삼가 내죽음을 말하지 말라고 한후, 곧 운명하였다. 향년 53세로 서거한 것이다.(징비록 : 有飛丸中其胸出背後 左右扶入帳中 舜臣曰戰方急 愼勿言我死 言訖而絶)휘하의 군관들은 충무공의 유언에 따라 그의 죽음을 극비에 붙이고 곡성(哭聲)을 내지 않았으며 여전히 지휘기를 흔들며 독전하였다. 정오에 적은 소탕되었으며 적선 200여척이 불타 전소되였다. 적병은 불타죽거나 물에 빠져 죽고 포로로 잡히거나 포탄과 화살을 맞거나 칼에 베어 죽어서 전멸되었다.도진의홍이 수습하여 패주할 때 적선은 불과 50척이었으며 소서행장은 전투중에 묘도의 해협을 통하여 먼바다로 패주한 뒤였다. 승기를 잡은 충무공은 이미 투구와 갑옷을 벗고 융복을 입은채 뱃머리에 우뚝서서 친히 북채를 들고 북을 치면서 맹열히 추격전을 지휘하였다. 3도수군 통제사의 붉은 융복이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찬란하게 빛났다. 충무공 좌우에는 전속부관 송희립과 조카 이완이 지휘기를 흔들며 거듭 독전하였다. 충무공기함은 쫓기는 적선과 불과 3∼4m 거리로 적선 갑판위에 엎드려 있던 조총 저격수가 융복을 입은 충무공을 3도 수군의 대장인 것을 인지하고 곧바로 조총을 발사 명중되었다. 전투는 아비규환 이었으며 바다는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물이 흐르지 못하고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였다. 3도수군 통제사의 전사와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덕장등 10여명의 장수가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이 역사적인 관음포 해전은 1598년 11월19일 새벽 4시에 개전하여 아침8시에 막을 내린 전쟁으로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종식을 내린 것이다. 관음포 해전과 임진왜란 7년 전쟁의 결과로 3도수군과 왜적의 참상을 기록으로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관음포해전 참화
왜수군 ① 전 함 : 불타거나 대파된 수 300척
② 전사자 : 200척×200명 = 40,000 4만명
③ 전상자 : 100척×200명×2/3=13,000 1만3천명
3도수군 ① 전 함 : (명군등자룡에 대여한 배) 1척
② 전사자 : 충무공을 비롯 단위지휘관 10명
③ 전상자 : 추산인원 300명
2.임진왜란 7년전쟁 참화
왜수군 ①전 함 : 불타거나 포획한 수 521척
전 함 : 대파한 수 414척
②병졸 살상한 수(약) 126,380명
3도수군 ① 전함(등자룡에 대여한 배) 1척
② 전사군관 10명
③군병 전사자(약) 1,022명
21.충무공의 위국충정과 살신성인
충무공은 임진왜란 7년 전쟁에서 신명을 받쳐 위국충정의 하는일에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능력을 남김없이 쏟아 국가와 민족앞에 산화한 분이다. 임진왜란을 위해 태어나서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평생을 받친 운명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온군력의 3분의 2 이상을 쏟아 부으며 조선을 침략했던 전쟁으로 충무공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역사속에 묵묵히 희생당한 사람이다. 일개 국민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국가수호의 책임을 지고 자기가 맡은 바 최선을 다한 3도수군 통제사로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충정은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남아 어떠한 국가적 위난이 닥쳐도 극복하는 승리의 정신으로 영원히 함께 할 위대한 국가수호 정신이다. 조국의 수호를 자임하고 순간의 허점도 스스로 용납치 않았던 긴장속에서 대장의 권위보다는 병졸의 자세로 언제나 함대의 선두에 나서서 싸운 용감한 군인다운 충무공 그는 백전백승의 상승장군의 신화를 남긴 유일무이한 무성(武聖)으로까지 추앙 받아야 함이 당연하며 그 위대한 정신은 우리 전 민족의 혼으로 정립하여 자손 만대까지 계승토록 하고 그 정신을 일깨워서 발전시킴으로서 이 나라가 그로 인하여 크게 융성(隆盛) 되게 하는 초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왜적의 침략 야욕을 여지없이 말살시킨 3도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토록 하여서 적의 병참선을 차단함으로써 계사년(1593) 정초에 평양에서 패전한 후 서울에 집결한 적을 아사(餓死) 직전에 놓이게 하여 적으로 하여금 부득이 남해안으로 총 퇴각하게 만들었던 사실들 원균이 3도수군을 전멸시킨 후 패잔 전선 13척을 수습하고 3도수군을 재건하여 울돌목(명량) 대첩에서 왜적함선 133척을 섬멸한 신화적 전술의 지휘와 충파 격파로 도합 300척을 소탕하여 승기를 잡으면서 출전시 입었던 투구와 갑옷을 붉은 융복으로 갈아입고 친히 북을 치면서 추격전을 독려 하던 중 쫓는 적전과의 불과 3∼4M 거리가 될 때 적의 조총 저격수 총격이 충무공의 가슴에 명중되어 실신될 때 유언으로 전쟁이 한참 급한때니 내 죽음을 알리는데 삼가하라 말을 끝내고 절명한 장군의 살신성인의 애국심에 감동치 않을 수 없다. 이 대목에서 평상시 군인이 전쟁수행도중에 예복을 갈아입는 사례는 드문일이며 충무공이 3도수군 통제사 예복(융복)을 입고 적의 표적으로 내민 속마음을 두고 말이 많을 수 있다. 혹자는 재임중에 자심한 당쟁으로 국익에 반하는 분열과 반목으로 자신이 2회나 백의종군한 사실과 왜란 평정후 공과를 논할 때 다시 자신의 문제등으로 물의를 미연에 예방 또는 해소하고자 선택한 순국이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다는 평이 있다. 임진왜란 7년전쟁을 종식시키는데 육전에서 충장공 권율 도원수와 함께 쌍벽을 이룬 3도수군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위국충정을 영원히 우리 전 민족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이순신장군의 리더십 유성은 평단문화사 2001
(조선 대장부) 이순신 박선식 규장각 1998
포구의 황혼 신채호 한경 1995
이순신: 왜란, 선초 그리고 죽음의 의문 남천우 역사비평사 1994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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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27
  • 저작시기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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