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성사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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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원효성사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원효(圓曉)의 일대기

2.원효의 사상
2.1. 불도에 있어서의 사상.
2.2. 그의 생활속 사상

3.원효의 죽음 그 이후
3.1. 혈사에서 죽음을 맞이한 구룡대사 원효
3.2. 한국 불교사에 우뚝솟은 봉우리 원효

4.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본문내용

원효대성은 화쟁국사, 의상대상은 원교국사라 시(諡)하노니, 유사는 주석하던 곳에 비를 세워 덕을 기록해 무궁토록 드리우게 하라."」
의천과 하천단이 다같이 원효의 화백가이쟁을 높이 찬양했고, 이는 숙종이 원효에게 화쟁국사를 추증하게 된데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은 한국불교 사상 원효의 위대성을 가장 절실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의 원효에 대한 간절한 심회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글이 바로 《제분황사 효성문》이다. 그의 원효에 대한 생각은 각별했다. 그러나 의천은 일찍 요절함으로써 원효 연구를 심화시키지는 못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의천의 병이 위독함에 왕인 숙종이 친히 위문을 하였는데, 바로 그 달에 숙종은 원효에게 "화쟁국사"호를 추봉 했다고 한다.
해동종이라는 종파가 생겨 원효의 유법을 계승, 천명하기도 했다.
해동종의 중심도량은 송악산 기슭의 왕륜사 였다.
원효의 교악은 고려의 균여, 의천, 지눌, 요세, 보환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흔히 원효를 대성, 성사, 효성 등으로 존칭했는데, 의천 보환, 이규보, 이인로, 일연 등이 모두 이 존칭을 사용했다. 특히 「성사원효」운운으로 시작되는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의 서술에는 원효를 각별히 존경하는 일연의 뜻이 보인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원효와 의상스님은 그 마음이 옛 부처님과 서로 부합했네」라고 읊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  불교가 심하게 억압받고 쇠퇴했던 조선시대에도 원효가 잊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원효에 대한 인식은 구전설화에 의한 신이한 도승 정도가 고작이었다.
고선사와 분황사에 전하던 원효의 비는 깨어졌고, 여러 유적지는 잊혀져 갔으며, 많은 명저들은 읽는 이 없이 흩어지고 겨우 몇 편이 간행되었으 뿐이었다.
원효의 구체적인 저술을 통한 학문적인 탐구는 쇠퇴되어 미약한 명맥을 잇기도 어려웠음에 반해 민중들에 의한 산승으로서의 원효에 관한 구전은 더욱 광범위하게 유포되기도 했다. 원효가 창건했다거나 혹은 주석 했다는 70여 사암이 있는 것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현대 : 민족적 위기를 맞아 민족운동이 줄기차게 전개되고 있던 최근에 20세기 초에 이르러 원효는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즉, 그의 위대성이 강조되었는데, 그것은 민족적 자존심으로까지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장도빈(1888~1963)은 1917년에 《위인원효》를 간행했는데, 책의 분량이 64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이 전기는 주목할 만한 업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우려는 의도에서 집필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장도빈은 원효를 배워서 정신적 양식을 삼자고 강조함으로써 원효를 통해서 민족적 자존심을 찾으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최남선(1890~1957)은 1930년 7월 하와이에서 열린 「범태양불교대회」에 제출하기 위해 《조선불교 - 동방문화사상에 있는 그 지위-》라는 장편의 원고를 썼는데, "원효, 총불교의 건설자"라는 항목에서 원효의 위대성을 강조하였다. 원효의 불교사적 지위에 관해 최남선은 누구보다도 요령 있게 설명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상해의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던 조소앙(1887~?)은 1933년경에 《원효대사전》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원효의 탁월한 업적을 7종대성으로 천명했다. 즉, 경(境), 행(行), 지(智), 정진(精進), 방편(方便), 증득(證得), 업(業)등의 일곱 가지가 모두 훌륭했다는 것이다.
1925년에는 최영환 등 45명의 동경불교유학생들에 의해 「원효대성 찬양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3.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원효는 1300여 년의 세월에 걸쳐 우리 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고승으로 추앙 받으며 한국 불교사상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원효, 그는 존경받던 고승이면서 환속한 거사였고, 예언자이기도 하였으며, 뛰어난 사상가 이면서도 실천적 행동인 이었다. 그에게는 일정한 범주가 없었고, 굴레도 구애도 없었다. 그는 해방자 이었고 자유인 이었다. 그는 온갖 사슬과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우려야할 인간의 참모습을 이론적으로 밝혔을 뿐 아니라, 온몸으로 보여 주기도 했던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7세기를 살았던 원효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잘 만들어진 명곡은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들어도 촌스럽다거나 듣기에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원효의 사상이 그러하다. 원효의 사상에는 시대와 민족과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다. 그의 사상은 신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세계인 동아시아 전체에 통하는 보편사상이었다. 종교적으로도 불교에만 한정된 사상은 아니다. 비록 주제와 용어의 표현이 불교적이지만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능히 불교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그의 사상에는 오늘의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성과 참신성이 있다. 그가 파헤쳐 보여주고 있는 마음의 세계와 화쟁의 논리, 그리고 자유인의 몸짓 등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선다.
원효는 스스로 어둡고 긴 밤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이기도 염원했다. 7세기의 신라에서 원효가밝힌 등불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지로 퍼지며 수많은 가슴에 불을 붙이고 환하게 밝혀 주었다. 그리고 그 등불은 지금도 꺼지지 않고 있다.
흔히 학자들은 원효를 아직 채굴이 다 끝나지 않은 광맥에 비유한다. 원효에 대한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정리, 현존 저서의 충실한 역주, 현대의 언어로 다시 읽고 쓰는 해석학적인 접근 등은 우리들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참고문헌
1. 『원효에서 다산까지』, 김형효, 청계출판사, 2003. 3. 10
2. 『원효결서 1,2』, 김중태, 화산문화, 1997, 8. 5
3. 『일심과 실존(원효와 야스퍼스의 철학적 대화)』, 신옥희, 금풍문화사, 2000. 5. 25
4. 『원효대사』, 이광수, 우신사, 1981. 10. 15
5. 『역사로 읽는 원효』, 김상현, 고려원, 1994. 4. 20
6. 『원효대사』, 은정희, 민족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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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07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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