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개혁운동과 정치세력 결집양식의 변화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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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세도정치기의 정치세력

3. 개화파의 형성과 충의계 / 근대적 정치결사의 맹아

4. 독립협회와 근대적 정치결사

5. 맺음말

본문내용

럼 경제개혁을 둘러싼 지배집단 내의 대립이 상당한 정도로 해소된 전제 위에서 대립의 축은 정치질서 개혁으로 집중되었다. 아관파천 이후 갑오개혁이 좌절되고, 광무정권이 수립된 조건에서 개화파의 맥을 잇는 세력들은 일시 잠복했다가 독립문 건립문제를 계기로 하여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초기의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일종의 「일시적 목적단체」에 불과하였지만, 차츰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정권의 핵심에 있던 인사들이 이탈해 나가고 독립협회는 하나의 정치집단, 정치결사로 변모하게 된다.
) 朱鎭五는 독립협회가 정치집단화하는 계기를 러시아 재정고문 알렉시예프의 철수요구로 잡고 있다. 朱鎭五, 앞글 pp.84∼85
이 때 독립협회의 요구는 「의회의 설립」 - 독립협회 인사들의 정권참여 주장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지만 - 이었는 바, 이는 확실히 이전까지의 정치운동과 구분되는 획기적인 요구였다. 앞서 일본의 경우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의회 설립 요구는 궁극적으로 정당 결성을 밑받침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물론 이 때의 의회설립 요구가 입헌군주제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었고, 권력으로부터의 소외를 만회하고자 하는 지배층 내부의 제한전에 불과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의회설립 요구 자체보다도 그 요구의 제출방식이었다. 고종에의 상소운동 외에 「만민공동회」의 소집을 통한 집단적 시위운동이 병행되었던 데 정치집단으로서의 독립협회의 발전된 모습이 확인되는 것이다. 물론, 이 당시의 만민공동회에 대해서는 독립협회에서 동원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적 입장이 제출되어 있다.
) 朱鎭五, 앞글 참조. 반면, 愼鏞廈는 만민공동회 운동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의 대중적 확산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의 독립협회 예찬이 지나친 감은 있지만, 부르주아적 개혁에 대한 대중적 요구의 확대를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갑신정변 단계에서는 정변 주체들을 친일역적으로밖에 평가하지 않던 서울 시민들이 어찌되었든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독립협회 인사들의 주장에 동조하였다는 것은 그 대중적 지반의 확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독립협회가 평민과 연계된 정치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협회 주도층의 反민중적 성격 - 그들 또한 지주계급이었음에 유의하라 - 은 독립협회를 정당적 차원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차단하였으며, 그 결과 고종의 해산명령에 쉽사리 파괴되지 않을 수 없게끔 하였다.
) 여기에는 운동의 전국적 지반이 극히 협소했던 점도 관련이 있다.
결국, 갑오개혁과 뒤이은 광무개혁은 그 추진주체는 달랐지만, 일정하게 당시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또한 그 대중적 지반이 확대되고 있었던 데 따른 것이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이와 같은 부르주아적 개혁의 대중적 지반이 결코 반제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 개혁 자체가 제국주의에 밀착되어 진행되었을 뿐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의 확대에 따른 사회경제적 변화를 이용하면서 성장한 세력이 개혁의 지지세력이 되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독립협회 회원들의 일반적인 親日性이나 광무정권 담당자들의 지나친 대외의존성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소 무리한 재단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아마도 이들 개혁으로 말미암아 실질적인 이득을 얻은 계층은 상품화폐 경제의 확대에 대응하고 있던 지주들과 상인층이었을 것이다.
) 농민들의 경우에는 광무개혁을 통해 거의 아무런 이득도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광무년간의 양전, 지계사업에 대한 농민의 반대운동을 다룬 것으로 趙東杰의 <地契事業에 대한 定山의 農民抗擾>가 있는데, 이 글에 의하면 지계사업 자체의 근대적 성격과는 무관하게 그 사업추진과정의 봉건성이 농민의 반발을 야기하였다고 한다. 趙東杰, 1981 《史學硏究》 33 참조.
그렇다고 해서 이들 개혁 및 개혁운동에 대한 지지세력이 그에 국한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독립협회가 反러시아 운동을 벌였던 것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제국주의 축출에 이해관계를 갖는 광범한 도시 소시민과 수공업자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갑신정변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이러한 호조건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가 개혁요구를 끝까지 추진할 수 없었던 것은 왕권 자체를 부정하지 못한 의식상의 한계 - 불철저한 반봉건성 - 와 아울러 제국주의의 문명화 측면에 압도된 그들의 근대화 지상주의 - 반제성의 부재 - 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5. 맺 음 말
이제까지 세도정치기 정치세력의 결집양식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발전되어 왔는가에 대해 간략히 서술해 보았다.
갑신정변 단계의 개화파는 세도정치의 틀 안에서 출현한 관계로 형식적으로는 봉건적 붕당의 형태밖에는 취할 수 없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봉건적인 가족주의를 뛰어넘는 근대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를 근대적 정치결사의 맹아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화파는 정부 내의 협소한 자기 세력 외에 대중적으로 세력기반을 확보하려는 전망을 세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는 개화파의 한계라기 보다는 부르주아적의 성장이 극히 미약했던 당시의 조건에서는 불가피한 결과였다.
갑신정변 단계의 이러한 한계는 18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부분적으로 극복된다. 독립협회는 갑오개혁이 좌절되고, 그와는 별개의 광무개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갑오개혁의 구상을 잇는 세력에 의해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집권 관료세력 외에 상당수의 재야 지식층이 참가하였는데, 이는 일단 정부 내의 관료집단만으로 구성되었던 초기 개화파의 조직적 한계를 상당 정도로 극복한 것이었다. 특히 이들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이기는 했지만, 대중을 동원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대중과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인식지평을 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여전히 지주 - 양반출신이라는 자기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으며, 그 때문에 불철저한 입헌군주론을 제기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고, 대중의 혁명적 요구를 수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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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13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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