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패의 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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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불패의 이순신, 그는 어떻게 이겼을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들어가며

2.줄거리

3.독후감

본문내용

만다.
그 실수를 알게 된 것은 노량의 밤이 물러나고 11월 19일 날이 밝아 오면서 일본 함대 앞에 펼쳐진 것은 앞이 가로막힌 포구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순신이 지능적으로 적의 함대를 그곳으로 유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일본군은 이순신과 진린에 포위되어 “죽느냐! 사느냐!” 의 사생결단의 자세로 정면대결을 펼친다. 전투는 더욱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적과 아군의 함선이 서로 뒤엉켜 눈에 보이는 대로 격파하고 그러지 못하면 격파 당했다. 적의 얼굴이 보일 정도의 근접전이 펼쳐지고 나무토막에 불을 붙여 적함에 던지는 상식 밖의 전술도 구사될 정도였다.
근접전으로 치르는 피의 전투를 견디지 못한 일본의 선봉함선이 포위망이 느슨해진 틈을 뚫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 도주는 순식간에 일어나 일본 함대 전체로 번져갔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의 덜미를 낚아채느라고 여념이 없던 이순신에게 달아나던 적군이 쏜 탄알이 이순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치명적이었다. 이순신의 가슴을 치고 나간 총탄은 그의 목숨을 요구하고 있었다. 비상사태였다. 이때 이순신은 그의 마지막 벅찬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부하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전투가 급하다.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그의 유언을 받은 부하들이 독전을 계속하여 전투를 끝까지 치렀다. 500여 척이던 함선은 이미 300여 척으로 줄어 있었다. 이날 오전까지 계속된 노량해전은 일본군의 대패로 막을 내렸다.
노량해전의 전과는 적선 200여척을 격파하고 그 격침에 사망자가 수천명이라고 한다. 노량 바다는 피로 물들었고 이순신의 피도 거기 더해졌다.
3.독후감
이순신은 덕수 이씨 출신으로 흔히 말하는 뼈대 있는 집안이었으나 1545년 3월 8일 지금의 서울 인현동 부근에서 사화로 몰락한 사림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문인으로 입신양명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2세 늦은 나이에 무인이 되었다. 시작은 늦었으나 가슴은 뜨거워 7년전쟁 전부터 영웅기질이 싹트고 있었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지 1년여 만에 조일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최후의 격전인 노량해전에서 장엄한 죽음을 맞았다. 이순신은 조일전쟁의 한 가운데 태산처럼 우뚝 서 있는 장수이자 조일전쟁이라는 대하극의 주인공이었다. 이순신은 늦게 관직에 나가지만 대쪽같은 성품으로 인해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상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원칙을 중시 하였기에 심지어 파직까지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진족의 침입을 격파하고, 유성룡의 도움으로 전라좌수사까지 오르게 된다. 유성룡은 이순신보다 3살 위였고 어려서 같은 동네의 절친한 사이였기에 이순신의 숨겨진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 것이라고 보여진다.
예사롭지 않은 이순신의 삶은 우리에게 ‘물러서지 않음’이라는 화두를 선사한다. 이순신은 외부의 적은 물론이고 내부의 적에게도 물러서지 않았다. 심지어 이순신은 죽음에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물러서지 않음’의 절정은 전투였고 그 전투를 통해 한반도를 살렸다.
그래서인지 냉철했던 사관도 [선조실록]에서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아, 애석하다”고 탄식을 남겼다.
이순신은 물에 물탄 듯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선택했지만 지는 전투는 하지 않았다. 그가 만약 미적 거렸다면 수군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고, 실질적으로 병력 충원에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며 조선은 물론 명나라 까지도 일본에 의해 점령당했을 것이다.
지금은 위엄 있는 지휘관보다 소탈하고 격의 없는 스타일의 지휘관을 좋아한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이순신은 너무 강경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당시에는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공식 대화 창구를 마련해 부하 장수들과 대화를 하기도 하였고 혼자만의 단독에 빠져 결정을 내리게 되는 위험을 스스로 제거한 셈이었다.
역사란 것은 어차피 추론이고 판단의 영역에 속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곳곳에 실린 자료들은 저자가 많은 역사자료를 수집하여 좀더 사실에 가까운 진실된 결론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정성들이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전투나 업적은 그 시대의 흐름에서 파악해야 하는데 대다수의 글은 단순히 이순신의 행적만 다루었던 것과는 많은 차이점을 느낄 수 있었다.
전쟁은 침략을 당하는 쪽이나 침략을 하는 쪽이나 민초의 피와 눈물로 진행된다. 거창한 전쟁의 명분을 들먹거리는 자들은 민초의 고통은 애써 외면하고 자신들의 전과에만 마음을 둔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온 역사의 진실인지도 모른다.
최종적으로 조일전쟁을 요약하면 “조일전쟁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다. 그 조일전쟁의 최고의 수훈자는 이순신이다. 그리고 이순신에게 힘을 준 것은 조선의 민초이다.” 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이 이긴 전쟁이지만 아직도 일본은 ‘실패한 전쟁’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우리도 스스로가 조일전쟁을 ‘임진왜란’이라고 부르면서 난을 ‘당했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은가?
이순신이 보여준 장엄함의 극치는 죽음의 순간이었다. 그는 그때 호흡을 멈추었지만 그 죽음은 마침내 극복되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호흡을 하고 있다. 이순신은 권율, 원균과 함께 선무공신 1등급으로 선정 되었는데, 원균을 포함한 것은 아마도 선조가 자신이 파면한 치부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결과로 밖에 볼 수 없다. 자신이 무능함을 알면서도 자존심을 중요시 했던 것 같다.
7년전쟁의 여파로 명과 일본의 정권은 바뀌었지만 조선왕조는 무사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민초들이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7년전쟁 때보다 더 한심한 작태가 벌어지고 있다. 정치권의 이전투구는 극에 달해있고, 가진자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는 사회 곳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남북이 갈라진 틈새에서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는 우리를 넘보고 있다. 진정 우려되는 것은 일본이 착실한 군사대국으로 치닫고 있는 점이다. 국론은 분열되었고 강대국 눈치 보기 바쁘다. 안으로는 자기 자신. 밖으로는 무능한 조정과 일본을 동시에 보았던 이순신처럼, 지금 우리도 내부의 적, 외부의 적을 동시에 바라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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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7.28
  • 저작시기2005.0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8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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