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말려초의 선종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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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말려초의 선종에 대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선종성립의 배경

2. 9산선문의 성립

3. 선종의 사회적 기반과 성격

본문내용

있던 상황에서 공부(貢賦)를 조달받지 못하자, 국가재정이 고갈된 정부가 조세 납부를 독촉함으로 말미암아, 농민봉기가 전국화한 것이 진성왕 3년(889년)에 폭발한 농민봉기였던 것이다. 전쟁기의 고난에 대해 징효절중(澄曉折中)은 진성왕이 국사로 봉하는 것을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세상이 온통 혼탁해졌습니다. 반딧불로 기나긴 밤의 어두움을 걷어낼 수 없고, 아교로 황하의 거센 탁류를 막을 수 없는 것이지요. 보이는 것마다 악의 길이오니, 사실 삶의 행로 자체가 싫어집니다.”
반딧불이나 아교와 같은 시세에 절중(826~900년)이 놓여 있음을 편지를 띄워 답을 한 구절에서 읽게 된다. 농민봉기 이후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워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와의 한반도 주도권 쟁탈이 시작되기까지, 선사들은 절중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민봉기 이전에 다양한 신분집단과 균형잡힌 관계를 유지한 선사들이 886년 이후에는 농민군의 약탈과 위협에 시달리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진성왕 2년(888년)에 절중은 영월에서 공주를 거쳐 진례군[금산] 경계를 지나다 농민군에 의해 길이 막힌다. 그 뒤 896년 이전 어느때인가 농민군이 충돌하는 곳이라 하여, 당시까지 머물던 무주 분령군[숭주 안락면] 동림사를 떠나, 배를 타고 당성군[경기 남양]을 거쳐 수진[강화] 은강선원에 머물다 죽음을 맞이한다. 유골과 사리는 그를 상징한 사자산 흥령선원이 이미 891년에 병화(兵化)로 불탔으므로 동림사로 안장한다.
당초 흥령선원에서 남하한 목적은 삶을 정리하고, 전남 화순 쌍봉사에 있는 스승 철감도윤의 탑비에 참례하기 위해서였다. 무주 동림사를 떠날 때는 중국 유학을 꿈꾸나 풍랑으로 좌절된다.
시대상황을 고려한 면이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절중도 지배계급과 밀착한 선사는 아니었다. 헌강왕과 정강왕의 예우는 받았으나 대면한 적은 없었으며, 진성왕의 예우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와 같이 당시의 비교적 양심 있는 지성에 속하던 절중도, 체제에 대한 농민의 분노가 옥석구분(玉石俱焚)의 상태로 치달은 농민봉기 시기에, 신변의 안전에 위협을 느껴 타의에 의한 유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호족세력과의 관계로 잘 알려진 사굴산문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범일의 임종을 지킨 낭원개청과 난공행적은 굴산사에 머무르는 동안 농민군의 침탈을 여러번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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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900년대 초에 후삼국이 정립하기에 이르러서야 적고적(寂袴賊), 초적(草賊),구적(寇賊), 산융(山戎), 야구(野寇), 구융(寇戎), 초구(草寇) 등으로 불린 농민군의 존재가 해체되거나, 일부 농민군의 지도부가 호족으로 변신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호족과 선사들의 밀착관계가 형성되고, 후삼국 쟁패가 치열한 지역에서는 세력권의 변화에 따라, 연고지의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꾀하게 된다. 즉 선종의 관념성이 지닌 현실인식의 한계가 농민 봉기 이후 농민군에게 물리적압박을 받으면서 점차 지배계급에게 의탁하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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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5.10.16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15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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