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두 목사와 신유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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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초기 한국교회에 나타난 신유운동

3. 김익두 목사의 초기 신유사역

4. 김익두 목사의 신유사역 전개

5. 김익두 목사의 신유부흥운동 내용과 특징

6. 맺음말

본문내용

어려운 지경에 이를 정도가 되자, 직접적 안수기도의 형태에서 간접적인 기도의 형태로 차츰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두통, 눈, 귀, 폐, 목, 코 등 질병 발생 위치의 종류대로 그룹을 지어 앉게 하고 집단적으로 기도했다.
) 위의 책.
또한 김익두의 부흥사경회에서는 치병을 체험한 사람들의 '공개간증'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간증을 통해 사람들은 그들이 체험한 부흥의 역사를 내면화할 수 있었고, 신앙공동체로서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김익두 목사의 상세한 신유부흥운동의 기록을 가진 『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을 참고 할 때, 김익두 목사의 신유부흥운동은 방법론적인 면에서 '기도'를 통한 치유의 성격을 강하게 띤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통합의 매개가 된 '기도'를 공통분모로 하여 하나님의 은혜, 인도자의 권위(카리스마), 참여자의 헌신 및 결단이 구조적인 통합을 이루는 가운데 구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맺음말
1920년 대 초 한국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빠져 있었다. 3·1 운동에도 불구하고 독립이 이루어 지지 않은 상황에서 민중들은 일제 식민 통치 아래, 우리 민족은 두 가지 생존 양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 두 가지 생존양태의 가능성은 '친일'과 '항일'(독립운동)을 축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대다수 민중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민과 갈등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 민중들이 그러한 갈등 돌파의 가능성을 종교에서 찾은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것이다. 민중들의 이러한 기대는 현실의 고통을 초월하는 그 무엇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내세에 대한 열망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현실적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열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1920년대 30년대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이러한 민중들의 열망을 종교적으로 수렴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특별히 이적치병(異蹟治病) 현상을 중심적인 내용으로 하였던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은 교회의 성장과 설립 그리고 성도 수의 부흥을 이끌어 냈으며 1920년대-30년대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김익두 목사 이후의 부흥운동에서 그의 방법이 유형적으로 답습되고 있으며 해방이후의 신유사역의 방법론에도 많은 부분이 닮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부흥운동에 대한 이해는 한국교회 초기 부흥운동의 원형을 살펴보는 길과 함께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신유부흥운동 연구의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신유운동이 식어 간다. 1920년대 중반은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을 통해 벌어진 병 고침 현상에 대해서는, 당시의 교계와 사회와 언론에서 상반된 견해가 존재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한편에서는 임택권 목사를 중심으로 '김익두 목사 이적명증회'가 조직되어 김익두 목사 부흥회를 통해 치유를 체험한 사람들의 신상과 사건기록을 정리하여『조선예수교회 이적명증』이란 문서를 만들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교계 일각에서는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를 통해서 벌어진 병 고침 현상에 대해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하였다. 1923년 황해노회는 장로회총회에 "금일에는 이적 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라고 규정한 장로교 헌법 조항의 수정을 건의했다. 그러나 1924년 열린 총회에서 황해노회의 이 같은 헌의는 부결되었다. 이러한 총회의 공적인 '이적부인'은 김익두 목사 부흥운동의 반경을 상당부분 감소시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내의 지식계층과 교회 밖의 사회주의자들로부터도 김익두 목사 부흥운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 간도 용정에서는 좌익 청년들의 물리력에 의해 김익두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가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은 이와 같은 교회 안팎의 반대에 부딪쳐 급격히 위축되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사의 한 전환기를 신앙운동의 차원에서 내면화한 도도한 흐름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황에서 현실을 헤쳐 나갈 신앙의 한 양태를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부흥운동은 상당한 정도의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의 주요 대상은 소외계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이 소외계층의 현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어떠한 시도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은 생각해 볼 부분이다. 하지만, 김익두 목사는 이들 소외계층에 필요한 '영성'을 메워주었다고 할 수 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인물들 가운데 김재준이나 주기철 같은 민족적 성향의 인물도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의 부흥운동이 교회의 제도권 차원에서도 호응을 얻었다고 볼 수는 없다. 교회의 제도권은 이른바 장로교의 '이적부인'을 통해서 그의 부흥운동을 신비주의로 규정하면서 일정 정도 선을 그었던 것이다. 제도권 교회의 이 같은 태도는 다음 세대에서의 부흥운동이 더욱 신비적인 형태를 취하게끔 하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주요한 경향 가운데 하나를 이루어 온 신유부흥운동 영역이 한국교회 내에서 들어난 위상을 갖지 못하게 하는 단서가 만들어졌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부흥운동은 진지함과 경건성을 확보한 것이었다. 그의 신유부흥운동이 기도를 매개로 구현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자의 권위(카리스마), 참여자의 헌신 및 결단이 구조적인 통합을 이루는 가운데 구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부흥운동의 가치를 볼 수 있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부흥운동은 제1세대의 사경회 전통에 비할 때, 무게중심이 '성경중심'에서 '기도중심'으로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제2세대의 부흥운동이 보다 '체험중심'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김익두 목사가 부흥운동을 전개할 때, 성경에 대한 강조를 소홀히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신유부흥운동의 핵심은 '기도를 통한 신유 체험'에 있었다. 이런 면에서 김익두 목사의 신유부흥운동의 방법론 및 전통이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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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1.10
  • 저작시기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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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19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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