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머리말
II. 『三國史記』와 『三國遺事』비교
ⓛ차이점
1) 저자 및 시대적 배경
2) 저술목적
3) 역사관
4) 서술방법
5) 구성 및 체제
6) 신라의 역사구분
7) 의의
②공통점
1) 신라중심의 역사서술
2) 발해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제외
III. 맺음말
II. 『三國史記』와 『三國遺事』비교
ⓛ차이점
1) 저자 및 시대적 배경
2) 저술목적
3) 역사관
4) 서술방법
5) 구성 및 체제
6) 신라의 역사구분
7) 의의
②공통점
1) 신라중심의 역사서술
2) 발해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제외
III. 맺음말
본문내용
두 경상도 출신이라는 것이다.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는데 김부식은 경주 출신이고 일연은 경상도 경산 출신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신라문화에 익숙하였고 백제와 고구려보다는 신라를 부각시키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신라는 비록 唐나라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건한 뿌리였기 때문이다. 민중들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고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신라의 통일에 정당성을 알려야 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2) 발해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제외시켰다.
『三國史記』의 가장 큰 약점은 우리민족의 태초인 古朝鮮을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고조선의 성립과정에서 자신의 사관과 맞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교를 내세우는 김부식에게 하늘에서 환웅이 내려와 단군왕검으로 인해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밖에 안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약점은 고구려의 후신인 渤海를 기록하지 않은 점이다. 그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渤海를 오랑캐의 민족으로 생각했지 않을까한다.
이에 반해 『三國遺事』에서는 고조선을 기록하였다. 또 발해를 언급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발해를 우리 민족으로 인식한 것이 아닌 말갈족으로 편입시켰다. 이를 살펴보면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인데, 그 추장 조영(祚榮)때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단(震旦)으로 불렀다. 선천(先天)연간에 비로소 말갈이란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 하였다. 개원(開元) 7년(719)에 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하였다.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자 명황(明皇)이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니,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쳐 마침내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는데, 그 후 당나라 천성(天成)초에 거란의 공격을 받아 격파된 이후로 거란의 통제를 받았다. (중략)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야말로 나라의 해악이요, 말갈의 땅은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접하였다. 고운기,『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월인, 2001
『三國遺事』의 기록을 보면 발해를 적극적으로 우리의 역사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발해를 말갈족의 후예로 보고 간단하게 기록하였던 것이다. 본디 발해는 다수의 말갈인이 있었지만 그들은 다수의 피지배층이었고 지배층은 대부분이 고구려인들이었다. 이를 김부식과 일연은 알지 못한 것 같다. 발해에 대한 자세한 연구와 우리 민족으로의 편입은 조선 후기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보면 나와 있다.
고려가『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다. (발해고서문) 발표자료에서 재인용함.
III.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인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三國史記』는 김부식이 인종때 지은 삼국시대 역사서로서 유교적 德治主義,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 유교적 합리사관에 철저한 책이었다, 이 책은 의의는 한국 전근대 역사서술을 한 차원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는 데 있다. 첫째는 삼국을 1세기부터 완성된 국가로 파악하고 국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이해했으며, 둘째 천재지변과 인간활동을 연결시키면서 역사를 바라보고 국왕의 정치행동을 연결시켰으며, 셋째 역사를 교훈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넷째 강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였고, 마지막으로 역사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비록 『三國史記』가 김부식의 自意에 의한 편찬인지 인종의 명에 의한 편찬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 당시 중국과 비교해 우리의 역사서가 없음을 한탄하여 최초로 역사서를 지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와 비교해 본 『三國遺事』는 전문적 사관(史官)이 아닌 일개 승려가 지었다는 한계가 있지만, 사관보다 해박한 지식과 역량이 있었기에 역사서 저술이 가능했다. 그는『三國史記』를 바탕으로 누락시켰거나 혹은 누락시켰다고도 보여 지는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원형대로 온전히 수록한 데에 오히려 특색과 가치를 지니며, 실은 『三國史記』보다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역사서로 일컬어 질만 했다. 이는 『三國遺事』가 따분하고 멋없는 대부분의 역사서와 달리 많은 사람들을 매혹하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 위주의 서술방식과 자주 의식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껏 필자는 이 두 역사서를 이분법적인 사고로 떼어서 보았지만 이 역시 잘못된 방법임을 알고 있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는 동시대에 저술된 것이 아니고 『三國遺事』가 100여년 후에 나온 것임을 안다면 이를 평면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비교해 봄으로써 무엇이 다른지 확연히 알 수 있었고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보다 올바른 학습법은 『三國史記』와『三國遺事』를 함께 읽어나가며 서로 부족분을 매꿔 나가는 것이다. 그래야만 삼국 시대와 그 이전의 역사 전체를 개관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한다.
≪참고문헌≫
최남선, 『삼국유사 해제』, 민중서관, 1971
박종만,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1999
정구복,『새로읽는 삼국사기』,동방미디어, 2000
고운기,『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월인, 2001
윤사순, 『한국 유학의 흐름과 삼국사기』, 정신문화연구원, 2001
박진태 외,『삼국유사의 종합적 연구』,박이정, 2002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을유문화서, 2002
정구복, 『삼국사기의 현대적 이해』, 2004
2) 발해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제외시켰다.
『三國史記』의 가장 큰 약점은 우리민족의 태초인 古朝鮮을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고조선의 성립과정에서 자신의 사관과 맞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교를 내세우는 김부식에게 하늘에서 환웅이 내려와 단군왕검으로 인해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밖에 안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약점은 고구려의 후신인 渤海를 기록하지 않은 점이다. 그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渤海를 오랑캐의 민족으로 생각했지 않을까한다.
이에 반해 『三國遺事』에서는 고조선을 기록하였다. 또 발해를 언급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발해를 우리 민족으로 인식한 것이 아닌 말갈족으로 편입시켰다. 이를 살펴보면
발해(渤海)는 본래 속말말갈(粟末靺鞨)인데, 그 추장 조영(祚榮)때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진단(震旦)으로 불렀다. 선천(先天)연간에 비로소 말갈이란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 하였다. 개원(開元) 7년(719)에 조영이 죽자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하였다.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자 명황(明皇)이 그를 책봉하여 왕위를 잇게 하니, 사사로이 연호를 인안(仁安)으로 고쳐 마침내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 그 땅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었는데, 그 후 당나라 천성(天成)초에 거란의 공격을 받아 격파된 이후로 거란의 통제를 받았다. (중략)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야말로 나라의 해악이요, 말갈의 땅은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접하였다. 고운기,『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월인, 2001
『三國遺事』의 기록을 보면 발해를 적극적으로 우리의 역사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발해를 말갈족의 후예로 보고 간단하게 기록하였던 것이다. 본디 발해는 다수의 말갈인이 있었지만 그들은 다수의 피지배층이었고 지배층은 대부분이 고구려인들이었다. 이를 김부식과 일연은 알지 못한 것 같다. 발해에 대한 자세한 연구와 우리 민족으로의 편입은 조선 후기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보면 나와 있다.
고려가『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여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이다. (발해고서문) 발표자료에서 재인용함.
III.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인 『三國史記』와 『三國遺事』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三國史記』는 김부식이 인종때 지은 삼국시대 역사서로서 유교적 德治主義, 군신의 행동, 사대적인 예절 등 유교적 합리사관에 철저한 책이었다, 이 책은 의의는 한국 전근대 역사서술을 한 차원 높여주는 역할을 했다는 데 있다. 첫째는 삼국을 1세기부터 완성된 국가로 파악하고 국왕을 절대적 지배자로 이해했으며, 둘째 천재지변과 인간활동을 연결시키면서 역사를 바라보고 국왕의 정치행동을 연결시켰으며, 셋째 역사를 교훈을 위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넷째 강한 국가의식과 자아의식을 강조하였고, 마지막으로 역사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비록 『三國史記』가 김부식의 自意에 의한 편찬인지 인종의 명에 의한 편찬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 당시 중국과 비교해 우리의 역사서가 없음을 한탄하여 최초로 역사서를 지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이와 비교해 본 『三國遺事』는 전문적 사관(史官)이 아닌 일개 승려가 지었다는 한계가 있지만, 사관보다 해박한 지식과 역량이 있었기에 역사서 저술이 가능했다. 그는『三國史記』를 바탕으로 누락시켰거나 혹은 누락시켰다고도 보여 지는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원형대로 온전히 수록한 데에 오히려 특색과 가치를 지니며, 실은 『三國史記』보다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역사서로 일컬어 질만 했다. 이는 『三國遺事』가 따분하고 멋없는 대부분의 역사서와 달리 많은 사람들을 매혹하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 위주의 서술방식과 자주 의식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껏 필자는 이 두 역사서를 이분법적인 사고로 떼어서 보았지만 이 역시 잘못된 방법임을 알고 있다. 『三國史記』와 『三國遺事』는 동시대에 저술된 것이 아니고 『三國遺事』가 100여년 후에 나온 것임을 안다면 이를 평면적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서로 비교해 봄으로써 무엇이 다른지 확연히 알 수 있었고 어떻게 발전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보다 올바른 학습법은 『三國史記』와『三國遺事』를 함께 읽어나가며 서로 부족분을 매꿔 나가는 것이다. 그래야만 삼국 시대와 그 이전의 역사 전체를 개관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지 않을까한다.
≪참고문헌≫
최남선, 『삼국유사 해제』, 민중서관, 1971
박종만,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1999
정구복,『새로읽는 삼국사기』,동방미디어, 2000
고운기,『일연과 삼국유사의 시대』, 월인, 2001
윤사순, 『한국 유학의 흐름과 삼국사기』, 정신문화연구원, 2001
박진태 외,『삼국유사의 종합적 연구』,박이정, 2002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 『삼국유사』, 을유문화서, 2002
정구복, 『삼국사기의 현대적 이해』,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