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의 사회경제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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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학농민운동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시대적 배경

Ⅲ. 사회경제적 배경
1) 국결의 감소문제
2) 전제와 양전 사업 문제
3) 지방관리 사회

Ⅳ. 계층분화와 농민봉기
1) 계층분화
2) 농민봉기

Ⅴ. 맺음말

본문내용

도 내정개혁을 수행한 다음에야 철병할 것을 주장하였다.
전주화약 이후 외국군대가 철수하지도 않고 청국 대신 일본이 승세를 잡고 침략전쟁을 강화해 오자 농민군은 “병사를 몰아 서울로 들어가서 권귀를 처단하고 외적을 몰아내어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 는 구호아래 재집결하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정부와의 화약이 결코 농민군의 무장해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주에서 철수한 농민군중 전봉준은 금구 ,원평 ,옥구 등지에, 김개남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요충인 남원에 본거지들 두고 그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 외에도 전라도 각지 및 충청도 일대를 농민군 부대장들이 분할 장악하고 언제든 재봉기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농민군이 재봉기하자 정부군과 일본군은 공주에서 서울로의 북진을 차단하기로 결정하고 일단 공주에 포진하였다.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점차 패배하여 논산방면으로 후퇴하였으며 전주에 있던 김개남이 이끄는 5000명의 군대마저 지원부대로서 주력부대에 합류하는데 실패하였다. 공주전투에서의 농민군의 패퇴를 고비로 정부군과 일본군은 본격적인 추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미 승세를 놓친 농민군은 태인 에서 최후의 결사전을 폈으나 동서 양면에서 추격해 오는 양면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로써 농민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끝이 나고 다음해 봄까지는 소탕작전에 대한 분산적인 저항이 있을 뿐이었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농민군의 진압과정에서 살상된 인원이 3-40만 명은 충분히 될 것이라 한다.
농민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양반, 관료, 토호 등도 民保軍, 守城軍을 조직하여 관군, 일본군에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농민군 내에서도 몰락양반, 유생 등에서 변절자가 속출하였다. 재기를 꾀하던 전봉준도 12월 말 부하의 배신과 지방민 韓信賢의 밀고로 체포되었으며 이로써 동학농민전쟁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
Ⅴ. 맺음말
동학 농민 전쟁은 조선 후기의 정치 사회 경제적인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초래한 일대 사건 이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국내적으로는 봉건 사회가 밑에서부터 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타격을 입었고 갑오경장이라는 근대적인 개혁을 가져왔다. 물론 일본의 강압에 의한 개혁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개혁의 주체는 조선정부이기 때문에 역사적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청 일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어, 우리 국토의 황폐화를 초래케 한 반면에 청나라 중심의 동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본이라는 새로운 세력으로 이동하는 변화를 초래했다.
동학은 최제우에 의하여 창립되어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괄목할만할 정도로 세력을 전국적으로 넓혀갔다. 조선정부는 동학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최제우를 처형하였으나 2세 교주 최시형은 지하로 숨어들어 포교활동에 전념한 결과 전보다 훨씬 많은 신도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동학은 실력으로써 교주의 죄목을 신원받으려고 삼례취회, 보은취회를 차례로 열어 정부를 당황하게 하는 한편 앞으로는 탄압을 하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시대적인 상황과 혁명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원인과 발생배경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먼저 갑오농민전쟁의 제일 요인으로써 조선봉건사회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토지소유를 둘러싼 문제를 취급하였다. 토지는 조선의 통치기구를 유지하는 기반이며 조선농민의 기본적 생산수단으로서 그 직접적인 이해관계야말로 농민으로 하여금 반봉건 투쟁에로 일어서게 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황폐한 토지가 정부의 적극적인 개간정책에도 불구하고 관리에 대한 국가의 봉록규정이 애매하였기 때문에 원총에서 제외된 장외부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기인하고 있었다. 실로 元摠이 줄어들고 時起가 줄어들고 實結이 줄어드는 삼 단계를 거치는 동안에 면세지가 국결 전체의 절반이상에 이르고 더욱이 그 면제된 몫이 다른 농민의 부담으로 전가되었기 때문에 일반농촌의 생활은 점점 어렵고 결국 파산의 지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量田事業은 국가조세와 직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기반을 가늠하는 중요한 국가사업인데도 불구하고 규정대로 20년마다 改量하기란 현실적으로 극히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연분이니 전분이니 하는 복잡한 규정을 가미하여 계산하여야 하였으니 모순에서 다시 모순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양전을 행하면 그럴 때마다 농민의 과세지가 늘어나는 한편 국가에로의 상납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그 차액이 지방 관리 분으로 횡령되었다.
이러한 제반 상황에서 관리들의 부정은 일반화 될 수밖에 없다. 조선조의 관리제 유지의기본적인 요건은 과거제의 공정한 시행에 있었는데도 매관 · 매관은 공개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한편 농촌에서는 스스로 계급분화 현상이 일어나며 기업적 지주가 등장하게 된다. 그들은 상업자본을 기반으로 한 고리대 방식을 취하는 기업적 지주가 있고, 경영적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적 지주가 있었다. 이러한 기업적 지주의 성장과 더불어 조선의 전통적 신분제는 파괴되어 상민이 하루아침에 양반이 되고, 양반이 어느덧 상민으로 전락하였으며 소작인으로 전락한 농민은 債務 農奴態的 특질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하여 농민전쟁은 필연적 내부요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농민전쟁으로 인하여 조선의 중세사회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불행하게도 동학농민군의 공주 패배로 인하여 일단 무산되기에 이르렀고, 우리 역사상의 자주성을 잃게 된 안타까운 역사의 시작으로 마무리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參考文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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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姜聲周, <東學農民戰爭期 社會 經濟 改革論 硏究 >, 2001, 全州大學校 敎育大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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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10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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